오늘의 (11/2) 말씀 묵상 (요한복음 15장7절, John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If you remain in me and my words remain in you,
ask whatever you wish, and it will be given you.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거함으로서 얻는 열매는 기도의 응답입니다. 예수님은 좌절에 빠지기 쉬운 제자들에게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응답받는 기도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물론 기도 응답을 위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제자들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 관계는
언제나 상호관계이지 일방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과 연합하여 그 분의 생명을 공급받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모든 운명이 주님과 함께하는 데 달려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기도는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는 미신이나 부적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믿음이 없이는 응답이 안 됩니다.
자신의 욕심을 위한 기도도 응답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이 아니요, 말씀 안에 거하는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우리 원대로가 아닌 하나님 원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보다 하나님께 어떻게 하면 좋은지부터 묻는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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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11/1) 말씀 묵상 (요한복음 15장4절, John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Remain in me, and I will remain in you.
No branch can bear fruit by itself, it must remain in the vine.
Neither can you bear fruit unless you remain in me.
그리스도와 믿는 자의 하나 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음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완성될 수 있습니다. 나무와 가지와의 관계, 또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관계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은 바로 ‘안에 거하다’는 표현입니다. 성도는 예수님 안에, 예수님은 성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행위(doing)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being)의 문제를 의미합니다. 가지는 나무의 진액을 받아야 생명이 유지되고
열매도 맺을 수 있기에 반드시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만 합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우리가
주님께 붙어 있을 연합할 수 있는데 이것은 영적인 연합입니다. 성령 안에서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는
신령한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누리며 변화하게 됩니다. 오늘도 주님 안에 거하며 주님과 연합한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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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10/31) 말씀 묵상 (요한복음 14장1절, John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Do not let your hearts be troubled. Trust in God , trust also in me.
이 구절은 두 가지 요구가 담겨 있는데, 하나는 마음에 금심하지 말라는 권면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믿고 또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명령입니다. 여기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위로는 영적으로 낙심하지 말고, 믿음을 굳게 지키라는 의미입니다.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히려 위로를 받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들을 위로하신 그 분의 사랑은 진정
끝이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위로는 ‘하나님을 믿느니 또 나를 믿으라’는 권고와 연결되어 여태까지 지켜보았던 하나님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지하며 신앙을 지켜 근심하지 말라는 권면이 되니다.
성도는 어려움을 당할 때 일시적으로 흔들리고 낙심되기도 하지만 그 신앙 자체가 흔들려서는 안 되며 주께서 말씀하신
위로를 기억하며 담대히 눈앞의 현실을 대처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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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10/30) 말씀 묵상 (요한복음 6장38절, John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For I have come down from heaven not to do my will
but to do the will of him who sent me.
하나님은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행함’을 연결시킵니다. 먼저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임을 언급하시며,
자신이 성육신하신 목적이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함임을 강조하십니다.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는 불일치가 전혀
없습니다. 아들의 삶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보내신 뜻을 실천하기 위한 삶입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마지막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마 26:39) 기도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볼 떄, 너무 많은 경우에, 우리는 ‘자신의 뜻’을 따라 삶을 결정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의 삶에 진정으로 필요한 자세는 ‘아버지의 뜻’이 ‘자신의 뜻’보다 앞서는 생활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제자의 삶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도 예수님의 주님 되심을 인정함으로, 그 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니다. 먼저 뜻을 알기 위해 하나님께 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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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10/29) 말씀 묵상 (요한복음 6장35절, John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Then Jesus declared, ‘I am the bread of life,
He who comes to me will never go hungry, and he who believes in me will never be thirsty.’
인간에게 일용할 양식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사안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떡을 구하며 다가오는 무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떡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여전히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할 목적으로
계속하여 떡을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무지한 자들에게 놀라운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육신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기근을 해결해 주시는 생명의 떡이십니다.
세상에는 복되고 아름다운 것들이 많지만 어떤 것도 생명의 떡이 될 수 없습니다.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갈급하게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키시는 생명의 떡이 되십니다. 우리가 영적 생명을 유지하는 길은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를 지속하는 것입니다. 미루지 말고 오늘 그 분과 관계를 새롭게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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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10/27) 말씀 묵상 (요한복음 4장34절, John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My food, said Jesus, is to do the will of him who sent me
and to finish his work.’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영적인 대화를 마쳤을 때 제자들은 먹을 것을 찾아 가지고 왔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음식 드실 것을 청하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그 분의 뜻을
온전히 우리는 것, 바로 ‘잃어버린 영혼’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양식을 먹지 않으면 죽는 것처럼
하나님의 구령 사업에 동참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먹을 양식이 없는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양식을 얻는 일에만, 자기 일에만 힘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명에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인생의 목적을 이루는 이 양식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명하신 필수적인 과제임을, 사명임을 잊지 말고 복음을 뿌리는 일꾼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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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10/26) 말씀 묵상 (역대하 15장2절 하, 2 Chronicles 15:2 b)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그를 찾으면 그가 너희와 만나게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을 그를 버리면 그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The LORD is with you when you are with him.
If you seek him, he will be found by you,
but if you forsake him, he will forsake you,’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아사랴는 아사를 찾아가서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아사래가 매 처음으로
하는 말은 유다 백성이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이 그들을 만나실 것이지만, 만약 유다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도 그들을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아사랴는 지금 ‘신앙 관계의 원칙’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대하는 것 그대로 하나님도 그들에게 행하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의무는
하나님을 찾는 일에 계속하여 힘쓰는 것입니다. 아사랴는 상황과 환경을 뛰어넘으 담대하고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사역자들은 때로 상황과 환경에 압도되는 경우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사람을 바라보면 감히 메시지를 전할 수 없으나, 하나님을 생각하면 분명하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전달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까? 지금 우리는 누구를 찾고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그 분을 찾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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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10/25) 말씀 묵상 (역대하 7장15-16절, 2 Chronicles 7:16)
이제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Now my eyes will be open and my ears attentive to the prayers offered in this place.
I have chosen and consecrated this temple so that my Name may be there forever.
My eyes and my heart will always be there.
하나님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을 기쁘게 받으시고 그 분의 이름을 그곳에 영원히 있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솔로몬이 이전에 기도한 내용을 (6:20) 떠올리게 하는데, 솔로몬은 하나님이 예전에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고
하신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 곧 그 분의 눈과 마음을 성전에 두셨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상징적인 거처입니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눈 여겨 보시고 그들이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이시는 곳임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항상’이라는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성전에 계시면서 우리 형편을 살피시고 우리 간구를 들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수 있는 분임을 믿고,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엡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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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10/24) 말씀 묵상 (역대하 7장15절, 2 Chronicles 7:15)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Now my eyes will be open and my ears attentive to the prayers offered in this place.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에 주목하고 귀를 기울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분의 눈과 귀를 성전에 두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처럼 육체를 가지고 계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성전에서는 종종 하나님을 의인화 합니다.
이런 표현은 두 가지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해하심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직접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아십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심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특히
기도하는 사람을 이해하시고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성전에서 기도하기를 바라십니다. 성전을 기도의 중심지로 삼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오늘날의 교회는 구약의 성전과 같이 유일한 곳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어느 때든 예배당에 가서 기도하곤 합니까? 예배 드리는 곳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어 가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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