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2/20) 말씀 묵상 (골로새서 3장1절, Colossians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Since, then, you have been raised with Christ, 
set your hearts on thing above,
where Christ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God.
 
여기 ‘위엣 것’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영적인 덕목들을 말합니다.
땅을 벗어나 살 수 있는 인생은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위엣 것을 찾으라’는 권면은
실재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으므로 성도는 하늘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삶은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땀을 흘리는
노력과 분투가 필요함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환상 체험을 추구했던 이단들의 열정적
행동에 대응하는 것과 동시에, 땅의 것을 추구하는 노력과 대조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로 인해 죄 사함을 받고 다시 살아난 자들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믿음으로 새 생명을 얻은 자들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변화된 모습으로 새롭게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의무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묵상해 보고 위의 것으로 바꾸어 가십시다.


오늘의 (2/19) 말씀 묵상 (골로새서 2장20절, Colossians 2:2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Since you died with Christ to the basic principles of this world,
why, as though you still belonged to it, do you submit to its rules;
 
사도 바울이 명확하게 반대하는 점은 ‘세상의 초등학문’입니다.  이 표현은 유대교의 율법
이해를 가리키기도 하고, 인간 세상의 삶을 좌우하는 ‘영적 권세’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여튼 이런 규례에 묶여 사는 모습을 반대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실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중요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율법을 그리스도의 자리에 놓는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율법이 중요한 것은 맞지만, 그리스도를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가리키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속에는 신앙생활을 지나치게 율법적으로 이해하여 성경 말씀에 입각한 바른
신앙생활 보다는 교회의 전통과 법을 더 중요시하는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규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신앙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께 집중해야 합니다.
말씀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2/18) 말씀 묵상 (골로새서 2장19절, Colossians 2: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고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He has lost connection with the Head,
from whom the whole bod, supported and held together by its ligaments and sinews,
grows as God causes it to grow.
 
사도 바울은 골로새교회가 바른 기독론에 기초한 신앙을 가질 것을 호소합니다.
그 당시 거짓 교사들이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은 것에 대하여 바울은
마음의 분노를 가졌습니다.  ‘머리’는 근원, 또는 권위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몸을 통제하고
유지하며 성장시키는 근원으로 묘사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머리’시라는 사실은 그분이 성장시키는 근원이 되셔서 몸인 교회를
유지시키고 성장시키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이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으므로 그분과 떨어져 있다고 지적합니다.
 
교회의 영적 성장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단지 제도와 전통과 관습에
분주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들의 마음과 행위를 살펴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모습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빨리 주님의 머리되심을 인정하고 돌아가십시다.


오늘의 (2/17) 말씀 묵상 (데살로니가전서 5장18절, 1 Thessalonians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for this is God’s will for you in Christ Jesus.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에 필수적인 세 가지 중 하나인,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항상’이라는
부사를 수반하곤 합니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내게 주어지는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라는 의미이므로, 단순히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로는 실천하기 어려운 덕목입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성도는 이미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였으므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뜻’은 ‘신자들의 성화’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가장 원초적인 요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밖에서 성도들의 성화나 하나님의 뜻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감사하는 삶을 살아낼 뿐 아니라, 성령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2/16) 말씀 묵상 (잠언 3장9절, Proverbs 3:9)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Honor the LORD with your wealth,
with the first fruits of all your crops;
 
‘부요함’은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구절이 그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신실한 사람은 소출의 맨 처음 것을 주님께 헌물함으로써 그의 재물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사용합니다.  그것은 모세의 율법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신 26:1-3, 9-11)
 
‘소출의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믿음과 경배의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그 열매가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에게 풍성한 수확으로 복을 내리시고, 그의 창고가 가득하도록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재물과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그분을 공경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단순한 입술의 경배나 겸손과 신뢰함이 아니라,
외적인 면과 함께 물질적인 경배도 따라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함이 조물주에 대한 피조물의 최선의 태도요 바른 재물관입니다.


오늘의 (2/15) 말씀 묵상 (시편 69편30-31절, Psalms 69:30-31)

내가 노래로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I will praise God’s name in song
and glorify him with thanksgiving.
This will please the LORD more than an ox,
more than a bull with its horns and hoofs.
 
다윗은 현재 고통과 저주를 넘어서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는 가운데, 감사하며 찬양을
그분께 올려 드립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감사함으로 그분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면서 자신의 찬송과 감사가 황소를 제물로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할 것임을 확신합니다.
 
시인은 최고의 제물보다 진정한 감사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이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나다고
확신합니다.  ‘뿔과 굽이 있는 황소’는 완전히 자란 소로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제물을 대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받기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진정한
감사와 그 하나님에 대한 찬양임을 강조합니다.
 
다윗의 고백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닌 진정한 회개이며,
제물이 아닌 진정한 감사와 찬양이라는 사실을 배웁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2/14) 주일입니다.

오늘은 구정연휴와 겹치는 주일입니다.
여전히 주변 환경은 적대적이고 편파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삼위일체 전능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예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예배를 통해 불같은 성령의 충만을 덧입어
이 악한 세상을 넉넉히 싸워 이기는 복된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2/12) 말씀 묵상 (레위기 23장43절, Leviticus 23:43)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so your descendants will know that I had the Israelites live in booths
when I brought them out of Egypt.
I am the LORD your God.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주도한 분이 그리고 그들을 초막에 거주하게 한 것도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초막절에 그들이 해야 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초막을 짓고 일주일 동안 그곳에 거주하는 일입니다.  추수 때에 곡식을 지키기 위해
밭에 임시로 만든 초막과 유사했던 이 초막은 광야 생활을 나타내는 주요한 상징인
동시에 교육의 도구였습니다.
 
그들은 초막에서 지내면서 아버지들은 자녀들에게 그들의 조상이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에서 지낸 일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어린 시절 초막에 누워 하늘의 별을 보면서
선조들의 신앙,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그 성취에 대한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들을 때, 자녀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신앙의 대를 이어가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적 출생만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노력과 수고가 필요합니다.
다음 세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믿음의 본을 보이십시다.


오늘의 (2/11) 말씀 묵상 (출애굽기 15장2절, Exodus 15:2)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The LORD is my strength and my song; he has become my salvation.
He is my God, and I will praise him,
my father’s God and I will exalt him.
 
이 구절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여러 가지 은유적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의 하나님’등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하나님을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표현한 것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객관적인 관계 즉, ‘그의 하나님’으로 묘사하지 않고,
주관적인 소유격, 즉 ‘나의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당신으 주관적인 
은혜로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언약을 맺으셨으며, 그 언약을 오늘날까지 신실히 지켜
오셨던 것을 강조합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약속하신 구원과 영생의 언약을
지키고 계시므로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을 ‘나의 신앙 선조의 하나님’으로 부를 뿐 아니라,
또한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으로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까운 고백이 있는지…


오늘의 (2/10) 말씀 묵상 (사도행전 20장24절, Acts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소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However, I consider my life worth nothing to me,
if only I may finish the race and complete the task the Lord Jesus has given me
-the task of testifying to the gospel of God’s grace.
 
바울은 끊임없이 그리고 오로지 주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런 현실 앞에서 그가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생명이 참으로 귀한 것이지만, 자기 생명이 자기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에 대한 맹목적인 애착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자기 생명 때문에 자기 생명의
존재 이유를 잃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그에게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유일한 목적은 주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마치는데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달려갈 인생길이 곧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복음은 생명으로 생명을 전하는 사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