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6/12) 말씀 묵상 (하박국 2장19절, Habakkuk 2:19)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
Woe to him who says to wood, ‘Come to life’ or to lifeless stone, ‘Wake up’
Can it give guidance?  It is covered with gold and silver’
there is no breath in it.
 
사람이 가장 어리석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태도가 바로 손으로 만든 우상에게 자신의 바램을 아뢰는 행위입니다.
이 구절은 우상이 그것을 향해 기도하는 자에게 아무런 교훈을 주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즉 우상은 무생물인
돌, 나무, 금속 등으로 만들어졌기에 생명력이 없어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똑똑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그런 것 앞에서 제물을 바치고 자신의 소원을 빕니다.  이러한 우상을 숭배하는 일은 범죄한 인간이
결과적으로 다다르게 되는 가장 어리석은 상태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장에서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자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그 분이 만드신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긴다고 말입니다.  그들은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런 죄악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그냥 내버려두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그 분은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계셨던 분이십니다.
그 분에게 불가능은 없습니다.  그 분은 그 분의 뜻대로 모든 것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무엇보다도 세상 모든 것의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모든 피조물들은 그 분을 높혀야 합니다. 경외해야 합니다.  그리고 닮아가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로 모셨기에 모든 죄에서 해방된 자들입니다.  죄에서 깨끗하게 되었기에 믿은 후로는 더 이상
죄인인 과거의 삶을 그대로 살 것이 아니라 죄와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로 인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생명력도 없고 능력도 없는 우상을 섬기는 대신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섬기고 그 분의 인도함을 받는
믿음의 삶을 오늘도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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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6/11) 말씀 묵상 (디모데후서 4장3-4절, 2 Timothy 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For the time will come when men will not put up with sound doctrine.
Instead, to suit their own desires, they will gather around them
a great number of teachers to say what their itching ears want to hear.
They will turn their ears away from the truth and turn aside to myths.
 
때가 되면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기쁜 소식을 받지 않습니다.  그 때가 되면 말세지말이 가까이 온 겁니다.
그 때가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진리를 듣거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의 더럽고 거짓된 본성을 충족시켜
줄 만한 솔깃한 정보를 듣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됩니다.  그들은 헛된 망상 또난 그릇된 욕심을 만족시켜 줄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건전한 진리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좀 색다른 것, 감각적인 것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죄나 심판에 관한 메시지를 싫어하고, 대신 허탄하고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는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입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허탄한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귀를 간지럽게 해주는 스승들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세상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드런 사람들은 더 많아질 것입니다.  점점 그렇게 되어 가는 것을 봅니다.  강단에서 복음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죄에 대한 설교가 점점 줄어들고 대신 복을 받는다는 기복신앙적인 말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영적으로 깨어서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가끼이 하며 말씀으로 자신을 비추어보며
부패한 본성을 억제하고, 진리 가운데 거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귀있는 자는 성령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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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6/10) 말씀 묵상 (민수기 6장24-26절, Numbers 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The Lord bless you and keep you;
the Lord make his face shine upon you and be gracious to you;
the Lord turn his face toward you and give you peace.
 
이 말씀은 구약시대의 축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성호가 세 번이나 반복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하신
백성에게 철저하게 복을 주시기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의 마음 속에는 성도들을 향한 축복이 가득차 있습니다.
 
첫 번째는 보호하시는 복입니다.  여기서 지킨다고 하는 것은 목자가 양을 지키듯이 울타리를 치고 온갖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준다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는 은혜의 복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얼굴을 우리를 향해 돌리시고 환한 빛을 비추어 주는 것입니다.  은혜는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 거저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마땅히 허물과 죄로 
심판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신다는 겁니다.
세 번째는 평강의 복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부요를 누리고, 존귀를 누려도 심령에 평안이 없으면 그것은 진정한 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으로 인해 마음의 고요함을 주십니다.
이런 삼중 축복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할 것을 축복합니다.  그런 복을 빌어주고 누리는 복된 자녀로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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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6/9) 말씀 묵상 (야고보서 4장13-14절, James 4: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러 장사하며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Now listen, you who say, ‘Today or tomorrow we will go to this of that city,
spend a year there, carry on business and make money.’
Why, you do not even know what will happen tomorrow.  What is your life?
You are a mist that appears for a little while and then vanishes.
 
신약의 잠언이라고 부르는 야고보서에 저자는 허탄한 자랑을 하는 자들에게 경고합니다.  그가 책망하는 것은
장사나 이익을 취하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그가 책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돈을 벌려고 계획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장사를 하거나 사업을 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말하는 요지는 순전히 인간적인 생각으로 이익만을 좇고 떠벌리며 자랑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합니다.  그러니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더더욱 알지 못합니다.  살다가 보면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겨 계획에 차질이 생기기도 합니다.  살다가 보면 정말 뜻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 계획지 좌절되고
실패로 돌아가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며 오늘 하루 동안에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또한 언제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인생은 마치 해가 뜨면 순식간에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하게
오늘 주어진 시간과 환경을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하루야 말로 (present)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멋진 선물
(present) 입니다.  하나님과 동업하는 사람이 가장 확실하고 현명한 사람입니다.  오늘이 없이 내일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신실한 청지기의 삶을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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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6/8) 말씀 묵상 (사무엘상 2장6-7절, 1 Samuel 2:6-7)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서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The Lord brings death and makes alive;
he brings down to the grave and raises up.
The Lord sends poverty and wealth;
he humbles and he exalts.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심을 분명히 알야야 합니다.  그래서 그 분은
우리 삶에 관계된 모든 영역을 실제로 주관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 위에 계시면서, 우리의 삶과 죽음 그리고 복과 
화 모두를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역사를 그 분의 의도하신대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렇게 위대하시고 광대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세밀한 관심을 가지시고, 그들의 상태와 형편을 일일이 살피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또 하나님이 우리를 멀리서 그냥 바라만 보시지 않으시고 우리의 행위를 일일이 감찰하신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그 분 앞에서 우리의 행동과 마음 자세를 다시 한 번 추스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바로 알아
하나님 앞에서 교만을 버려야 할뿐만 아니라 마음과 생각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더욱 우리 가까이에
계셔서 우리를 보살피실 것입니다.  오늘도 전지전능하신며 동시에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경와하며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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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6/7) 말씀 묵상 (시편 119편165절, Psalms 119: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Great peace have they which love thy law;
and nothing shall offend them.
 
시편 119편은 성경에서 가장 긴 장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장엄한 찬송이 매 구절마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총 176절인
이 시는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단락이 나누어져 있으며, 또 각 단락은 여덟 절로 되어 있습니다. (22 x 8=176) 이 구절은
21번째 단락으로(쉰) 말씀의 능력에 대한 선언입니다.
 
먼저 저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다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평안은 히브리인들의
인사인 샬롬입니다.  이 샬롬은 외적인 것에 관계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평안을 말합니다.  아무리 외적으로
안정감이 있다고 할지라도 내적으로는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환경에 관계없이 흔들림이 없는 내적인 평안을 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사
장애물을 없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자는 그런 영적인 시야가 열려서 인간이 행할 의무를 알고
그것을 실천함으로 마음이 평안함을 누립니다.  반면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인 시야가 닫혀있기 때문에
마땅히 행할 바를 알지도 못하고 실천하지도 못하기에 마음이 불안하고 궁극적으로 파멸의 길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만 알고 있으면 이런 평안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을 때 그런 놀라운
은혜를 맛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진정으로 믿을 때 모든 장애물은 사라질 것이고 심지어 고난이나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쓰여진 말씀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있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할 때 위로부터 임하는 영원한 흔들림이 없는 평안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의 시작인 1편에도 저자는 복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능력과 생명력과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말씀
속에서 찾고 누리는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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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6/6) 말씀 묵상 (시편 27편3절, Psalms 27: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Though an army besiege me, my heart will not fear;
though war break out against me, even then will I be confident.
 
성경에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을 꼽으라면 다윗을 뺴놓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이 모두 무서워서 감히 나서지
못했던 블레셋의 거인 장군 골리앗을 향해 어린 다윗은 당당히 나가 맞섰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간다’  그야말로 한 여름의
시원한 얼음냉수처럼 우리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365번 나온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마귀가 하루 한 번은 두려움을 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이 두려움은 한 단어와 같이 쓰이는데 그 단어는 바로 ‘not’입니다.  다시 말하면 ‘두려워하지 말라’입니다.
나는 오늘 무엇 때문에 두려워 합니까?  내 이름, 내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니 두려움이 몰려 오는 것은 아닙니까?
다윗이 두려움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주제를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을 의심하지 않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오늘 나와 함께 하시는 한 우리는 원수도, 질병도, 고통도, 실패도, 심지어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할렐루야!  그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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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6/5) 말씀 묵상 (시편 19편4절, Psalms 19: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May the words of my mouth and the meditation of my heart be pleasing
in your sight, O Lord, my Rock and my Redeemer.
 
저자인 다윗은 하나님을 반석이요 구속자라고 고백했습니다.  반석이라는 말은 거대산 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힘을 상징합니다. 다윗은 완전한 율법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만 그 죄를 이길 힘이 없기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또 그 하나님은 죄를 깨끗하게 속량해 주시며 모든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구속자이심을 고백하며
자신의 모든 죄의 문제를 그 분이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고 기도해 왔습니다.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은 기도의 다른 표현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말과 묵상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깊은 묵상이 바로 입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런 온전한 마음의 기도를 하나의 제사로 여겼기에 
하나님 앞에서 열납되기를 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근본 원인은 바로 죄에 있습니다. 또한 불행하게도 죄인인 인간은 스스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석이시요 구속자이신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었기에 전과 같이 똑같은 죄를 답습하지 않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약하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그런 기도야말로 하나님께서 흠향하시는 기쁨의
제사가 됩니다. 다윗처럼 해결하지 못하는 죄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 긍휼과 자비를 얻어 자유를 회복하는
복된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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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6/4) 말씀 묵상 (디모데전서 6장7-8절, 1 Timothy 6:7-8)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For we brought nothing into the world, and we can take nothing out of it.
But if we have food and clothing, we will be content with that.
 
우리는 얼마 만큼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어야 족한 줄을 알까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통과할 때 하루분의 만나를 날마다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내일 일을 주관하시기에
그 분이 알아서 해 주신다는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 아무도 오늘 하루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다고 해서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그리 많이 않은 것 같습니다.
또한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고 사는 사람도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자신이 부족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족하다고
느끼고 행복해 하지 않습니다.  적지 않은 것을 가지고도 상대적 빈곤에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자족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그대로 믿고
내일 일은 그 분께 맡기고 오늘 하루를 주신 것에 감사하며 살 때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도 자족하는 열매가 주렁 주렁 열리는 신나는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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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6/3) 말씀 묵상 (데살로니가전서 1장3절, 1 Thessalonians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We continually remember before our God and Father your work produced by faith,
your labor prompted by love, and your endurance inspired by hope in our Lord Jesus Christ.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때 단 3 안식일만 머물렀던 데살로니가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그들의 삶 속에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는 초대 교회 당시 널리 사용되던 말이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과 사랑과 소망입니다.  이 세 가지는 ‘사랑장’인 로마서 13장에서도 나타납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유기적인 관계가 있으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의 사람들의 삶에 나타나는 중요한 덕목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삶에서 나타난 이 세 가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
 
이 세 가지는 사도 바울이 항상 그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기도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사도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밖에 
머무리지 못하고 떠나야 했기에 특별히 그들이 자주 떠올랐고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가 응답이 되어 온 아가야지방에 그들의 아름다운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러니 염려했던 바울에게 얼마나 기쁨이 
되었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어떤 내용입니까?  늘 자신에 관한 것은 아닌지요?  물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셨기에 구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기도가 항상 자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요 기복신앙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의
변화에 대해 간절히 기도합니까?  지체들을 향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기도함이 있습니까?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 대해 믿음으로 섬김이 나타나기를, 사랑의 수고가 있기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위해 기도합니까?  복음을 받아들인지 3주밖에 안 되는 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성숙한 믿음의 삶이 드러났다면 믿은지
더 오래된 사람에게는 더 성숙한 삶이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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