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6/24) 말씀 묵상 (고린도후서/2 Corinthians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Now we know that if the earthly tent we live in is destroyed,
we have a building from God, an eternal house in heaven,
not built by human hands.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이 땅에 소망이 있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더 많이 가지려고, 더 높이 올라가려고, 더 오래 살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자신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그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기에
그것이 소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사도는 이 세상의 삶과 천국의 삶을 구별하면서 ‘땅에 있는 장막 집’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으로 비유합니다.  천막으로 만든 장막 집은 유한하며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무너집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에게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땅에 사는 동안 부활하여 살, 영원한 집을
바라며 소망을 가지고 삽니다.  그것이 확실하면 확실할수록 삶에 활력이 넘치고
자족과 감사가 있습니다.  암울한 현실 속에서 하늘나라에 확실한 소망을 두고
기쁘게 살아가십시다.


오늘의 (6/23) 말씀 묵상 (베드로전서/1 Peter 2:2)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Like newborn babies, crave pure spiritual milk,
so that by it you may grow up in your salvation.
 
사도는 성도들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영적으로 성장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영적 양식을 사모하라고 권면하기
위해 ‘젖’을 갈망하는갓난아기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갓난아기가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것처럼 믿음을 시작한 사람들은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을 간직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자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는 것으로 이끕니다. (3절)
 
하나님의 말씀을 ‘썩지 아니할 씨’로 (1:23) 묘사한 것은 말씀에 생명을 부여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믿음의 삶에 뿌리를 내리고 새 생명을 창조하기
때문에 성도는 먹고 자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도 알지 못하고
말씀의 능력도 맛보지 못하고 삶도 풍성하지 못하고 평안이 아닌 불안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다면 교회도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합니다.
 말씀으로 성장하고 풍요로운 삶을 사십시다!


오늘의 (6/22) 말씀 묵상 (시편/Psalms 121:2)

나의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로서다
My help comes from the LORD, the Maker of heaven and earth.
 
이 시는 ‘순례를 위한 노래’로 순례의 길을 떠나는 이가 여정을 시작할 때 만난
이와 나눈 대화이고 그 사람이 순례자에게 주는 격려와 축복의 말이라고 봅니다.
순례 여정을 시작하자마자 순례자는 산을 향해 눈을 듭니다.  이 산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시온산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순례자가 그렇게 한 이유는 삶의 
여정에 필요한 도움을 찾기 위함이라고 밝힙니다.  산으로 가면 고달픈 인생에 
대한 해답을 찾을거라는 기대로 눈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시선은 그 너머의 하늘, 그리고 그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대지로
넓어집니다.  그러니까 진짜 도움은 눈에 보이는 산이라는 제한된 공강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천지를 지으신 절대자에게서 온다는 것을 깨닫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험난한 인생길에 가장 적합한 도움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우리를 포함하여
모든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그분을 믿고 기대하며 간절히 찾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6/21) 말씀 묵상 (역대상/1 Chronicles 16:10)

그의 성호를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마다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Glory in his holy name;
let the hearts of those who seek the LORD rejoice.
 
우리는 찬양하기를 좋아하지만 정작 찬양이 무엇이며 무엇을 어떻게 할지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주일에만 찬양을 드리고 그 외에는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찬양하는가?  우리는 그분을
찬양하기 위해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분의 역사를 찬양하고
그분의 언약을 찬양합니다.
 
그분의 성호를 찬양하라는 원뜻은 그의 이름이 거룩하기 때문에 찬양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자랑하다는 의미는 명령형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마땅히
갈급하며 감출 수 없는 큰 기쁨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찬양 중에 계시며
찬양 되시는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찬양은 단순히 기분이 좋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슬프든 기쁘든, 힘들 때든
형통할 때든 어떤 상황에서도 드릴 수 있어야 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때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영원히 변치 않으시고 신실하게 응답하시는 그분을 
오늘도 찬양하십시다.


오늘의 (6/20) 말씀 묵상 (시편/Psalms 145:10)

여호와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들이 주를 송축하리이다
All you have made praise you, O LORD;
your saints will extol you.
 
하나님을 찬양해야 함을 알고, 그리하겠다고 결심을 하지만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심지어 그 이유를 잊어버린 채 현실에 함몰하여 시기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며 지낼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그런 삶이 너무 쉽고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그분을 찬양하는 올바른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변함없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가 되는 길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 나라의 백성됨을 감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을 잊어버리면 찬양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묵상하는 자만이 은혜를 베푸신 그분께 감사하며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분은
멀리 계시고 명령만 내리시는 분이 아니라 그분의 시선은 피조물을 향하시고
오래 참으시며 인도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 사실을
되새기며 찬양을 드리십시다.


오늘의 (6/19) 말씀 묵상 (고린도후서/2 Corinthians 10:18)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For it is not the one who commend himself who is approved,
but the one whom the Lord commends.
 
사도는 진정한 자랑은 자기주장이나 자기 자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롯됨을 천명합니다.  원문에 가깝게 번역을 하면,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스스로를 추천하는 자가 아니라 주께서 추천해 주시는 자다가
됩니다.  ‘인정하다’는 단어는 시험의 과정을 거쳐 검증된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바울은 13장에 가서도 누가 이런 진정한 사람인지를 다시 한 번 질문합니다. (13:5)
 
사람의 판단은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이루어지지만 전지하시고
의로우신 주님은 자기의 기준을 따라 판단하십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외치는 공정이
얼머나 터무니 없는지 쉽게 봅니다.  그래서 파가 생기고 불신이 생겼습니다.
 
언젠가 그분이 공정한 재판장으로서 심판하시겠지만 믿음의 사람은 사람이나 세상의
판단이 아니라 그분의 판단을 두렵고 떨림으로 받아, 진리의 길을 감으로 그분이
인정하는 참된 제자의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6/17) 말씀 묵상 (로마서/Romans 12: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축복하라
저주하지 말라
Bless those who persecute you;
bless and do not curse.
 
성도는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을 축복하고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왜 믿음의 공동체 밖의 사람들은 성도를 핍박하는가? 그 이유는 성도가 그들과
같이 죄에 동참하지 않고 예수님과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만 잘난 척
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억울하기에 비판하고 저주하고
싶은 마음을 가질 수 있지만 사도는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축복하라고 합니다.
 
초대교회는 외적으로는 유대교인들과 로마인들로 인한 박해와 싸워야 했고
내적으로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성도들 사이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기에 그 사랑을 나누어 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기에 저주하거나 대항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주님이 가르쳐 주셨고 몸소 보여주셨고
초청하셨던 길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죽이고 실천하도록 노력하십시다.


오늘의 (6/16) 말씀 묵상 (베드로전서/1 Peter 3: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keeping a clear conscience,
so that those who speak maliciously against your good behavior in Christ
may be ashamed of their slander.
 
사도는 의를 위해 고난받는 것이 복이니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말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왜 그런가?  고난 중에 있는 성도가
가진 소망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질문에 변호할 것을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데 박해하는 자들에게 선한 양심을 가지고 대하고
있다면 믿는 사람들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회가 되고 그들의 비방이
부끄러운 것임을 드러내게 됩니다.
 
믿음으로 인해 고난받는 중에서도 우리는 자기 변호를 넘어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에 있는 고난이 아니라 그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의심이나 불평 대신에 소망과 기대가 생깁니다.
당연히 쉽지 않습니다.  평소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고난이 닥치더라도
기회를 삼을 수 있습니다.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굳건히 믿고 
선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참된 제자가 되십시다.


오늘의 (6/15) 말씀 묵상 (시편/Psalms 126: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Those who sow in tears will reap with songs of joy.
 
5절과 6절은 같은 말을 조금 달리하는데 농부가 파종 시기를 재촉하는 ‘이른 비’가
충분히 내리지 않아 걱정하며 씨를 뿌리는 모습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른 비가 제때 내리지 않으면 바알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굳건히
믿는 시인은 비록 지금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얼마가 되든 자기 몫의 단을 들고
기뻐하며 돌아오는 농부의 모습을 기대하며 소망합니다.  따라서 이 시는 감사의 
고백이라기보다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신뢰의 간구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귀환자들은 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전 
재건도 개인적인 삶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 모습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이라는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낙심하기보다 하나님꼐
기도하며 결실의 기쁨을 기대합니다. 
 
지금 흘리는 땀과 노력과 눈물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기에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기대하며 기쁨의 찬송을 드리십시다.


오늘의 (6/14) 말씀 묵상 (고린도전서/1 Corinthians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떄문이라
The man without the Spirit does not accept the things that comes from the Spirit of God,
for they are foolishness to him,
and he cannot understand them, because they are spiritually discerned.
 
‘육에 속한’은 문자적으로 ‘자연적인, 세상적인, 육신적인’의 뜻으로 ‘성령이 없는’ 
불신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받지 않는다’는 현재 시제로 불신자가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않는 것이 지속적인 특징임을 나타냅니다.  왜 그런가?  이런 것들은
영적으로만 분별할 수 있고, 육적으로는 어리석어 보이고 알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을 지식적으로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진리로 여길 수 없기 떄문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꼐서
못 박히신 십자가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여겨진다는 말과 연결이 됩니다.
반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모든 일을 근원적으로 문제를 파악할 능력을 
갖추게 될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방향을 잡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령을
가진 것만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고 충만을 유지해야 합니다.
기도하여 성령의 충만을 받아 분별력을 가지고 사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