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3/25) 말씀 묵상 (시편 37편23-24절, Psalms 37:23-24)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If the Lord delights in a man’s way,. he makes his steps firm;
though he stumble, he will not fail, for the Lord upholds him with His hand.
사람이 가는 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길인지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가는 길이 여호와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가 걸어가는 길은 견고하기에 그 사람이 결코 요동하거나 피곤하거나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그 길을 걸어가는 자는 결코 좌절하거나 장애에 걸려 넘어지거나 미끄러져서 다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길이요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굳게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길이라고 해서 항상 바르고 형통하고 평탄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의인도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는 것같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것같이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시고 늘 지켜보십니다. 그리고 완전히 넘어질 때면 손을 잡아주십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고 하신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셔서 그의 사랑스러운 자녀들을 눈동자같이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 우리의 손을 잡으시고 일으켜 주십니다. 이 사실에 우리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확신으로 험난한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바른 길을 걸어야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 분께서 영광의 면류관을 준비하시고 우리를 기쁘게 맞아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그 영광스러운 날을 그리면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의 길로 담대히 걸어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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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24) 말씀 묵상 (마태복음 17장20절, Matthew 17: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뇌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He replied, ‘Because you have so little faith.
I tell you the truth, if you have faith as small as a mustard seed,
you can say to this mountain, ‘Move from here to there’ and I will move. Nothing will be impossible for you.’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다’
주님을 쫓는다는 것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믿음의 문제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문제를 만났을 때 대처하는 가장 첫 번째 방법은 스스로의 믿음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겨자씨는 아주 작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지금 그렇게 작게, 아니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기에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 조차도 믿음을 점검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기 보다는 걱정 근심부터 합니다. 그리고 불안해 하면서 원망과 불평을 하고 사람을 찾거나 인간적인 방법을 찾습니다.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니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면 이상하지요.
우리가 생각할 것은 그렇게 작은 믿음만 있어도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는데 하물며 큰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큰 역사를 보겠습니까!
그러니까 믿음은 크고 작은 의미라기 보다는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로 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얼마만큼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믿음이 있으냐 없느냐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먄약 우리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있다면, 커다란 믿음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것을 가지고 행하는 것을 믿음이 좋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확실하게 언젠가 이루어진다는 확신입니다. 믿음은 미래지향적이요 긍정적입니다. 믿음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주님께서 오늘 이 순간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평가히신다면 무엇이라고 하실지 생각해보고 믿음을 끌어올려 눈에 보이는 유혹을 이기고 고난을 능히 뚫고 나가는 자랑스런 주님의 자녀된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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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23) 말씀 묵상 (이사야 63장7절, Isaiah 63:7)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I will tell of the kindnesses of the Lord, the deeds for which He is to be praised,
according to all the Lord has done for us..yes, the many good things He has done for the house of Israel,
according to His compassion and many kindnesses.
선지자는 공동체를 대표해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합니다. 여기서 ‘말하다’는 말은 회상하다, 기억하다는 의미입니다.
자비는 언약에 변함없이 신실하신 하나님꼐서 베푸시는 사랑을, 찬송은 찬양받으실 그분의 업적들을, 은총은 행위 가운데 구체화되는 이스라엘을 향한 그 분의 호의적인 성품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모성애적인 자기희생과 일방적인 베풂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그 분의 은총을 간구할 때 우리는 우리의 신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자 그 분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특권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자비하시며 은총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환난 가운데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분에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한량없는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 인생을 아시고 스스로 언약을 세우시고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그런 사랑과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의 이름을 높여드림이 마땅합니다. 또한 그 분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그 분께 신실하게 간구하는 삶이 되어야 함도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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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22) 말씀 묵상 (요한1서 2장10-11절, 1 John 2:10-11)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끔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Whoever loves his brother lives in the light, and there is nothing in him to make him stumble.
But whoever hates his brother is in the darkness and walks around in the darkness;
he does not know where he is going, because the darkness has blinded him.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계명 중의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말씀대로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빛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바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반대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어둠 가운데 거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한다면 형제를 미워할 수 없습니다. 만약 빛 가운데 거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한다면 그것은 거짓된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다른 누군가를 미워하고, 다른 이가 그러면 안 된다고 권면해도 미워할 짓을 했으니 미워한다고 받아칩니다.
하지만, 빛 가운데 거한다면, 하나님을 알기에,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은 자이기에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해서 마땋히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은 죄로 인해 죽을 죄에서 용서를 받았는데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잘못을 자신에게 했다고 해서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사랑을 받고 안다면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다시 죄를 짓더라도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꼐서 가르쳐주신 기도 (주기도문)에도 그렇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가 속한 교회는 물론이고, 집, 학교, 직장, 그 어디에서도 미움은 용납될 수 없는 어둠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3:18)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느나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다고까지 선포했습니다. (4:20) 사랑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랑하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덮어둘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자녀됨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혹시 그 상대방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사랑을 받은 자임을 기억하고 형제자매를 용서함으로 빛된 자녀임을 증명하는 믿음의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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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21) 말씀 묵상 (예레미야 14장22절, Jeremiah 14:22)
이방인의 우상 가운데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그리하는 자는 주가 아니시나이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앙모하옵는 것은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
Do any of the worthless idols of the nations bring rain?
Do the skies themselves send down showers? No, it is you, O Lord our God.
Therefore our hope is in you, for your are the one who does all this.
유다 백성에게 임한 기근은 단순한 자연적인 현상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외에 어떤 우상이나 하늘도 그 분의 심판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해결책이 됩니다.
생명도 없고 능력도 없는 이방인의 헛된 우상들을 의지해서 자신들의 번영과 안정에 대한 보증을 받기 원했던 백성과는 달리
예레미야는 참 신이시며 창조주이신 능력의 하나님께만 그의 기대를 두고 도움을 호소합니다.
그는 유다 백성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자비를 간청합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라고 호소하는 듯합니다.
지혜자와 권세자와 능력자들의 힘으로 세상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국제기구와 제도가 교육이 인간의 운명을 바꾸지 못합니다.
어느 정도 도움은 줄 수 있고 변화는 줄 수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세상을 바꾸시며 영혼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일한 소망이신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 분께 매달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우리의 운명을 바꾸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간구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머리로는 그렇게 믿으면서도 마음은 그렇지 못한 것은 아닌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과 역사를 보지 못하는 것이 믿음이 없어서가 아닌지요?
종종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심지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아닌지… 다시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그 분만 믿고 따라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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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20) 말씀 묵상 (마태복음 6장24절, Matthew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No one can serve two masters. Either he will hate the one and love the other,
or he will be devoted to the one and despise the other.
You cannot serve both God and Money.
한 사람이 두 말에 동시에 오를 수 없으며, 두 활을 동시에 당길 수 없음 같이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를 중히 여기면 다른 하나를 경히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100% 충성이요
100% 순종이지 반쪽짜리로는 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지 못합니다. 동시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재물은 Mammon으로 ‘재물 신’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재물 신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한 편을 사랑하면 다른 한 편은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중간이 있을 수 없고 거기에 똑 같은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십니다. 연인 관계나 부부 지간에 한 사람이 파트너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또 사귄다면 그게 온전한 사랑이 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 주인으로 모시고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두 가지를 비교하고 계신데, 그 비교가 맞지 않습니다.
한 분은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고 다른 한 쪽은 재물 즉 돈입니다. 재물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지 그것은 하나님과 비교할 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재물을 하나님과 비교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재물이 사람에게 주는 영향이 크고 유혹도 크다는 말입니다. 아니라고 말할 지 모르지만 돈은 그만큼 힘이 있습니다. 오늘날이 그렇지 않습니까?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세상 아닙니까? 그러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돈을 벌고 출세하고 성공하려고 합니다. 돈을 벌 수만 있다면 잠시 감옥에 가거나 법은 어길 수 있다고 여깁니다. 심지어 방해가 된다면 사람도 죽입니다. 그러니 그 돈이 주는 유혹이 얼마나 큽니까?
돈을 사랑하는만큼 하나님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돈을 섬기는 것은 부딪히기 때문에 절대로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인간의 약함과 악함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니 틀림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물질관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관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아까워하면서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것에는 아낌 없이 물질을 투자한다면, 없으면 빚이라도 내서 산다면 과연 그 사람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삶을 살고 있는 겁니까?
그러면서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돈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면, 돈이 인생의 목적이 되면 그 때부터는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유혹에 빠져 죄를 범하게 됩니다. 때로는 치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바르게 정당하게 노력해서 돈을 버시고 사용하시면 됩니다. 기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히 가겠습니까? 진정한 기쁨은, 영원한 기쁨은 하나님을 위해 물질을 벌고, 관리하고, 쓰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르게 청지기 정신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영원히 썪지 않는 하늘나라에 상급을 쌓는 것이고 그 분께 가면 큰 칭찬과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과연 우리 인생의 주인은 누구인지 다시 한 번 돌아보시고 다시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고 그 분만 주인으로 모시는 충성된 종, 자녀, 일꾼의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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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19) 말씀 묵상 (시편 46편5절, Psalms 46:5)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God is within her, she will not fail. God will help her at break of day.
레위 지파 가운데 한 부류인 고라 자손인 시인은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가 언급한 찬양의 내용은 성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주변 나라들이 떠들며 하나님의 성을 공격해 왔고
왕국은 흔들릴 정도로 위기에 처했습니다.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기에 고대 전쟁에서는 식량과 물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적들이 오래 성을 에워싸고 있으면 물을 공급하는 우물이 성 안에 없으면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성 안으로 물을 끌어들이게 되는데 그게 바로 히스기야 터널을 통해 들어오는 실로암 물입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예루살렘 성 안에 시내가 없습니다. 그런데 시편 저자는 한 시내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 시내는 바로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그 성이 무너지겠습니까? 외적이 아무리 막강한 화기로 무장하고 연합하여 공격해도
그 분이 계시기에 안전하고 부족함이 없습니다. 성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새벽에 도우신다고 고백합니다.
문자적인 뜻은 ‘아침의 기점에서 하나님이 도우시리이다’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침에 임한다는 것은 구약성경에 자주 나타나는 사상입니다. (5:3, 90:14, 143:8) 이것은 날마다 태양이 떠오르면 어둠이 물러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한 번 소리를 내시자 땅이 녹았다고 선언합니다.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피난처가 되신다면, 아무리 막강한 적이 수없이 몰려와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를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함께 하십니다. 이것은 그 분이 주신 약속입니다.
그러니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 분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으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분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원하는대로 건져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 분의 섭리를 모릅니다.
때로는 순교당하게 하실 수도 있고, 때로는 가진 것을 잃어버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중에서도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은 두려움없이 당당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 적들은 비록 해하는 힘을 가졌지만 오히려 두려워하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를 구원하시고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을 큰 소리로 찬양하고
선포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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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18) 말씀 묵상 (로마서 15장20절, Romans 15:20)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It has always been my ambition to preach the gospel where Christ was not known,
so that I would not be building on someone else’s foundation.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자신의 사도직의 진실성을 확증하기 위해 지금까지 소아시아와 지중해 연안 그리고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자신의 활동이 거둔 사역의 성공에 대해 언급한 다음 이 본절에서부터는 서양 (유럽)에서의 미래 사역과 로마 방문에 대한 생각을 피력하기 위해 그가 항상 자기 사역의 지침으로 삼아왔던 원칙을 로마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상기시킵니다.
그가 지금까지 지켜왔던 사역의 원칙이 무엇인가? 바로 이미 다른 전도자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 곳에서는 전도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이름이 알려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자신의 구세주로 고백한다는 철저한 신앙적 의미로 하는 말입니다. 이런 사도 바울의 고백은 이미 다른 전도자가 확실하게 복음을 전파한 곳에서는 더 이상 전도하지 않겠다는 깊은 선교 정책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것은 그의 강한 자존심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될 수 있는대로 복음을 듣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하겠다는 뜨거운 사명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개척자의 사명을 가지고 새로운 지역에 복음을 가져 가려는 그의 선교적 야망이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선교와 전도 원칙은 오늘날 성도들과 목회자들에게 커다란 교훈과 도전을 줍니다. 그것은 전도란 소위 ‘교인 뺏기 쟁탈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닥치는 희생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해산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기쁨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이런 사역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지금도 그런 전도자가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찾고 계시는 바로 그 전도자는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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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17) 말씀 묵상 (창세기 3장19절, Genesis 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By the sweat of your brow you will eat your food until you return to the ground,
since from it you were taken; for dust you are and to dust you will return.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죄에 대해 분명히 심판을 하십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범죄에 대햔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에게 고통과 죽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후 앞에서 다스린 모든 것들을 다스리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주셨지만 사람은 죄를 범한 후 고통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사랑하고 돕도록 창조하신 아름다운 부부 관계가 서로 지배하려는 종속적이고 고통스러운 관계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풍성한 먹을거리를 그냥 먹는 대신 한평생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겨우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범죄로 인해 보시기에 좋았던 자연 세계도 저주를 받아 황폐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뱀의 말을 들음으로 축복으로 받은 모든 풍요로움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죄의 결과요 하나님의 준엄하고도 고통스러운 심판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원래 만들어졌던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죄를 매혹적으로 보이게 하는 미혹에 속지 마십시오. 죄의 마지막은, 죄의 대가는 바로 죽음입니다. 그 어떤 죄도 결코 가볍에 여겨서는 안 됩니다.
마귀는 죄를 짓기 전까지는 ‘딱 한 번만’ 해보라며 달콤하게 유혹을 하다가 일단 한 번 죄를 지으면 그 다음에는 다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도록 정죄합니다. ‘네가 그러고도 하나님의 자녀냐?’ ‘네가 그러고도 뻔뻔스럽게 예배를 드리러 갈 수 있느냐?’ 등등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도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범하더라도 회개하여 죄에서 돌이키면
다시는 그 죄에 대해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그 지은 죄에 대해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얼마나 좋은지요.
가장 먼저는 죄의 심각함을 깨닫고 죄를 멀리하는 거룩한 삶을 살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렇지만 다시 똑같은 죄를 범하더라도
회개하면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죄에서 떠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감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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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16) 말씀 묵상 (고린도후서 5장21절, 2 Corinthians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 못하신 이를 우리로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God made him who had no sin to be sin for us,
so that in him we might become the righteousness of God.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죄가 없으신 아들 예수님을 마치 죄인처럼 십자가에서 죄의 대가를 대신 지고 죽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크신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구원을 화해라는 아름다운 용어로 설명한 것은 고린도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자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개념이 아름다운 것만큼이나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을 권면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한다고 표현했습니다.
누구라도 예수님을 자신의 죄값을 대신 갚아주시고 구원을 허락하신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은 영생을 얻음과 동시에 한 가지 임무가 주어집니다. 그것은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도 화목하게 하는 일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었듯이 우리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로를 믿는 사람들이 바로 교회요 그런 무리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공동체도 교회입니다. 그 교회의 사명은 먼저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교제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복음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통해 이 땅에 평화를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도 바울의 권면은 다시 한 번 21세기에 존재하는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화목하게 하는 직분이 아니라 오히려 화목을 깨뜨리고 덕이 되지 않는지 모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 오히려 ‘싸우는 곳’으로 여깁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생겼던 문제는 오늘날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냈던 편지가 바로 우리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로 여기고 말씀으로 돌아가 순종할 때
그런 문제들이 사라지고 진정한 평화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는 복음의 통로가 되고 있습니까? 화목하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믿음에 걸림돌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의의 도구가 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죄의 도구가 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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