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7/3) 말씀 묵상 (욥기 8장7절, Job 8: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Your beginning will seem humble, so prosperous will your future be.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이 구절에 있는 빌닷의 말, 곧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을
문맥에서 떼어내 부적절하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업을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을 갈망하며 이
말씀을 인용하거나 벽에 붙여놓기도 합니다. 욥의 친구 빌닷의 이 말은 따로 떼어 놓고 보면 그럴 듯 해보이지만,
욥의 경우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이 구절은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 은총을 구한다면, 순결하고 정직하다면 처음은 보잘 것 없을지라도 나중은 창대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참된 신자의 특징은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고 찾으며 하나님 앞에 서려고 애씁니다. 혹시 최근에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찾은 적이 있습니까? 그 때 간절함이 있었습니까? 기도할 때나 설교를 듣고 성경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이 가득했는지 돌아보십시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자는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서고자 깨끗하게 살아갈 것이고,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오늘의 (7/2) 말씀 묵상 (요한복음 14장6절, John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Jesus answered,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바로 앞 구절에서 도마는 예수님에 대하여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질문을 합니다.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니까?’
이 질문은 논리적으로 틀린 데는 없지만 문제 해결의 의지는 전혀 보이지 않는 질문입니다. 도마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인간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찾고, 그 분께 나아가는 것이
모든 문제의 해답임을 강조하십니다. 동시에 예수님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음을 선언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니면 어떤 문제도 해결될 수 없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길과 진리와 생명을 찾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길과 진리와 생명 그 자체이심을 공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과 친밀한 사람은 이미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 때문에 기독교가
배타적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이것이 진리이기에 어떤 타협도 있을 수 없습니다. 종교 통합은 거짓입니다.
오늘의 (6/30) 말씀 묵상 (요한복음 10장27절, John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My sheep listen to my voice; I know them and they follow me.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이자 은혜로운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듯, 하나님의 백성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이 진리를 깨닫고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삽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혼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인류의 스승쯤으로 여기는 자들은
말씀 조차 자기 마음대로 해석합니다. 자신의 지혜로 그 분의 가르침을 판단하며 가려서 듣습니다. 그들은 종일
배우지만 진리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런 모든 일들은 그들이 목자를 알지 못하기 양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자는 그 분의 음성을 분명히 알고 모든 인생길을 따라갑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은 그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압니다.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들에게서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구분할만큼 가까이 지내십니까? 그 분의
음성에 익숙하십니까?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오늘의 (6/29) 말씀 묵상 (요한복음 10장11절, John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I am the good shepherd.
The good shepherd lays down his life for the sheep.
사람들이 의지하는 것들은 대개 이해타산에 얽매여 있습니다. 물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관계도 이익을 따라 맺습니다. 이처럼 이해관계에 따라 양을 돌보는 자를 성경은 삯꾼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바라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양에 대한 책임감은 없습니다. 따라서 사나운 이리가
다가오면 자신을 보호하는 데 급급해 양을 버리고 도망칩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단순히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양으로 생명을 충만히 얻고 건강하게 최고의 삶을 누리는 것에까지 관심을 가집니다. 또한
양들의 목숨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 놓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의지하고 있는 많은 것은 참된 목자라기보다는 삯꾼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은 절대 우리의 안전과
풍족한 삶을 지켜 주지 못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 안에 있는 양뿐만 아니라 우리 밖에 있는 잃어버린 양들을
찾으시며, 그들의 삶을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누구를 믿고 따라갑니까? 또한 우리는 선한 목자에 속합니까
아니면 삯꾼에 속합니까?
오늘의 (6/28) 말씀 묵상 (요한복음 8장23절, John 8:23)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Then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는 영원한 염원이며 소망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죄에 얽매여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인이므로 심판과 형벌로부터 자유하지
못한 체 종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병을 알지도 못하는 시한부 인생처럼
무기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의 종입니다. 무거운 죄의 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면 아무도 하나님의 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서광은 자신이 죄인임을 분명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유로워 보여도 근원적인 죄의 속박을
알지 못하면 구원의 길은 열릴 수 없습니다.
죄의 짐은 무겁고 고통스럽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 짐을 벗고 참된 자유를 누립니다. 세상에 살고는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았으므로 상황이나 사건에 좌우되지 않는 자유입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죄를 대신 사해주신 구세주로 믿음으로 이 자유를 누리십시다.
오늘의 (6/27) 말씀 묵상 (사도행전 10장15절, Acts 10:15)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The voice spoke to him a second time,
‘Do not call anything impure that God has made clean.’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복음은 국경과 인종과 문화를 초월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속됨과 정결함은 인간의 경험이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모든 판단은 하나님의
몫이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인간 최초의 범죄는 하나님의 판단을 자기 몫으로 여겨
선악을 판단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생각은 한쪽으로 치우치기 쉽습니다. 자신의 기호와 판단을 의지해 복음 증거의 대상을 결정한다면
하나님의 사역은 온전하게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결정권을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는 그저 온전히 순종하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또한 역사하시는 것도 그 분께서 하실 것이기에 믿고 전하십시다.
오늘의 (6/26) 말씀 묵상 (로마서 9장16절, Romans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It does not, therefore, depend on human desire or effort,
but on God’s mercy.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든, 우리가 원한다거나 달음박질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절대 주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누구를 긍휼히 여기실지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한 은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합니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의 영여고가 인간의 영역을 혼동하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
오려고 노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다 알 수 없다는 명제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뜻은 우리의 것들과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납니다. (이사야 55:8-9)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십시다.
오늘의 (6/25) 말씀 묵상 (역대하 7장14절, 2 Chronicles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이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if my people, who are called by my name, will humble themselves
and pray and seek my face and turn from their wicked ways,
then will I hear from heaven and will forgive their sin and will heal their land.
고대에는 가뭄과 메뚜기 재난, 전염병 이 세 가지를 자연재해 가운데 가장 위협적으로 여겼습니다. 성전은 제사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집이었습니다. 비가 오지 않거나 메뚜기 떼가 곡식을 먹어 버리거나 전염병이
유행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악에서 돌이켜 겸손히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 죄를 사하시며, 땅을 고쳐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스스로 낮추고’는 현재 이스라엘 백성이 교만하다는 것이고, ‘기도하여’는 그들이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내 얼굴을 찾으면’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현재 하고 있는 행동들을 중지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와 겸손하게 간구하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나가 회개하고 돌이켜야 함을 알려주지만 또한 우리의 죄로 인해 땅도
병든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이것은 환경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는 우리 시대에 주시는 중요한 영적 교훈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 대신 간교한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땅도
저주를 받은 사실 또한 기억나게 합니다. 그만큼 죄의 영향력은 크기에 죄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오늘의 (6/24) 말씀 묵상 (역대하 6장20절, 2 Chronicles 6:20)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May your eyes be open toward this temple day and night,
this place of which you said you would put your Name there.
May you hear the prayer your servant prays toward this place.
사탄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의심하게 만들고 상황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이 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성품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연약한 인긴이 하는 기도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실 것을 호소했습니다. 부를 때 응답하시고 찾을 때
나타나실 것을 굳게 믿고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성전을 향하고 성전에서 하나님을 부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성전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있습니다. 또 성전에는 용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성전에 나아갑니까? 또 있는 곳에서 얼마나 자주 성전을 기억하고 기도합니까? 성전이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할 수 있으면 성전에서 기도하는 것이 집중하기에도 좋습니다. 국가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진정한 지도력입니다. 날마다 성전을 향해 거룩한 손을 드는 믿음의 리더가 되십시다.
오늘의 (6/23) 말씀 묵상 (역대상 29장11절, 1 Chronicles 29:11)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Yours, O LORD, is the greatness and the power and the glory and the majesty and the splendor,
for everything in heaven and earth is yours.
Yours, O LORD, is the kingdom; you are exalted as head over all.
다윗은 위대함, 능력, 영광, 승리, 존귀가 모두 하나님께 속했고,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매사에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또한 그는 부귀가 주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주권자로 고백하는 사람은 그분께 온전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고백은 오늘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 줍니다. 또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 지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대명제입니다. 하나님을 만유의
주재로 고백하며 그분을 자신의 주님으로 인정하십니까? 진심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인정할 때에야
우리는 그 분께 온전한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주권자이십니다. 그 분은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의 주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마음으로
겸손히 드리는 예물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마다 그 분께 받을 것을 돌려 드리는 것임을
기억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