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12/3) 말씀 묵상 (시편 12편5절, Psalms 12:5)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Because of the oppression of the weak and the groaning of the needy,  
‘I will protect them from those who malign them.’
 
많은 신앙의 인물들이 악이 득세하는 이 세상을 바라보며 과연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가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를 이야기 하기에는 너무 많은 악이 세상에
만연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오늘 본문에서 이러한 고민을 토로하면서도 결국 하나님이
가련한 자들과 궁핍한 자들을 외면치 않으시고 그들을 보존하시고 안전한 곳에 두실 것임을
선언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은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을 듣고 안전한
곳으로 옮기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도 이 시대를 향한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야 합니다.
 
패역한 세대 속에서도 하나님의 순결한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십시다.  하나님이 역사하심으로 악이 끊어지고 공의가 세워질 것을 확신하며 끊임없이
기도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오늘의 (12/2) 말씀 묵상 (시편 11편4절, Psalms 11:4)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The LORD is in his holy temple; the LORD is on his heavenly throne.
He observes the sons of men; his eyes examine them.
 
살다보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시련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너무나도 작아서 쓸모없이 보일 때도 있고, 우리가 당면한 문제에 비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너무 작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와 같이 지금 시인은 극심한 위험 가운데 빠졌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안전한 곳을 찾아 도망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럴 때일수록 성전과
하늘 보좌에 앉아 인생을 통촉하시고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경우와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분에게 피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함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황과 주위 사람들의 강권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 믿음은 우리가
어떤 위험과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함에서 나옵니다.  하나님 외에나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분명히 거부하는 견고한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12/1) 주일입니다.

샬롬!
오늘은 거룩하게 지키는 주일입니다.
각자 섬기시는 교회에서 신령한 예배를 드리며 주시는 말씀을 받습니다.


오늘의 (11/30) 말씀 묵상 (시편 10편12절, Psalms 10:12)

여호와여 일어 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Arise, LORD!  Lift up your hand, O God.
Do not forget the helpless.
 
시인은 악인의 교만과 불경건을 보고 하나님께 이와 같이 외칩니다.  이제 일어나시고 손을
드시옵소서…악인에게 수탈당하는 가난한 자를 잊지 마시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도와달라고 간구합니다.  여기서 다윗이 이렇게 기도한 것은 악인에 대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 대한 탄식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비난이나 불평은 아닙니다.
 
여기 ‘가난한 자’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려하는 것 때문에 고난 받는 성도들을
가리키는 상용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의 횡포와 폭행에 개입하셔서 싸우시기를
바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간섭과 역사를 촉구하는 기도를 드림과 아울러 최선을
다해 악을 제거하고 정의를 세우는 일에 앞장 서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일 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오늘의 (11/29) 말씀 묵상 (시편 10편4절, Psalms 10:4)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In his pride the wicked does not seek him;
in all his thoughts there is no room for God.
 
때때로 우리가 너무 힘들고 어려운데 하나님은 멀리 계셔서 우리의 사정을 모르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오늘 시인은 악한 자로 인해 어려움에 빠진 상태에서 잠잠하신
하나님을 향해 심판을 호소합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하나님을 신앙하는 성도로서 믿음을
표현하는 한 방법이 됩니다.
 
악한 자들은 탐욕스러운 자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들의 죄악을 보지 않으신다며,
심지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주장합니다.  이것은 무신론 사상의 근원입니다.
이 사상은 교만한 마음으로 양심이 극도로 둔해졌을 때 결론적으로 나타나는 사상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집단적이고 구조적인 악 앞에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한탄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까지도 하나님 앞에 들고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분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불신자처럼 혼자서 염려하며 걱정하는 일은 없습니까?


오늘의 (11/28) 말씀 묵상 (마태복음 20장27절, Matthew 20: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and whoever wants to be first must be your slave.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의 주요 관심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저런 방법으로 높이 올라가 군림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높아지고
싶다면 군림하려고 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섬겨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놀라운 비밀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그 분은 섬기기 위해 오셨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과 섬김과 희생의 자세를 견지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눈앞의 이익과
자리를 탐하기 보다는 멀리 보고 바르게 보는 시각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는 섬김 받는 길을 걷습니까, 아니면 섬기는 길을 걷습니까?  가정과 교회, 그리고 이웃을
위해 우리가 섬겨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섬길 지 구체적으로 계획해
보고 행하십시다.


오늘의 (11/27) 말씀 묵상 (마태복음 19장30절, Matthew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But many who are first will be last,
and many who are last will be first.
 
하나님 나라에서는 세상의 보상 원리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주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자신은 청지기로 여기며 나눔과 섬김으로
겸손하게 살아가던 사람들 중 끝가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면 처음에는 욕심을 부리며 세상의 명예와 욕심을 위해 살아가다가 훗날 깨닫고 돌이켜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드리고 나눔의 삶을 살아가는 부요한 사람도 많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자신의 순종과 희생, 그리고 봉사의 정도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서열을 정하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서열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적에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 받은 자들은 순종과
봉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겸손히 순종하는 것이 진정으로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태도입니다.  마지막까지 낮아져서 섦기는 삶을 사십시다.


오늘의 (11/26) 말씀 묵상 (마태복음 18장20절, Matthew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For where two or three come together in my name, there am I withe them.
 
여기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누구의 이름으로 모으느냐가 중요합니다.
수천 명, 수만 명이 모였다고 해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 아니면 교회가 아닙니다.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랍비들의 말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앉아서 율법의
말씀에 사로잡힐 때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 있으리라’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다’란 말은 자신을 부정하고 대신 신앙의 대상으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말씀이시기 때문에 신령한 집회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됩니다.
 
이러한 예배에 예수 그리스도는 함께 하셔서 신령을 복을 내려 주시고 예배에 참석한 자들의
마음을 주장하시며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오늘의 (11/25) 말씀 묵상 (마태복음 16장19절, Matthew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I will give you the keys of the Kingdom of heaven;
whatever you bind on earth will be bound in heaven,
and whatever you loose on earth will be loosed in heaven.
 
여기서 ‘천국’은 교회를 의미하며, 천국 열쇠는 예수님에 의해 장차 설립될 교회에 관련된 어떤
권위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권위는 매는 것과 푸는 것으로 나누어집니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에서 말하는 교황의 면죄권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주로 모신 교회의 복음 전파 사역과 깊은 관계가 있는 권한입니다.
 
예를 들어, 이 말씀은 베드로가 성령 강림 후에 솔선하여 유대인의 차별적 의식을 따르지 않고,
복음의 모든 특권을 이방인에게도 허락하는 사견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열쇠는
베드로나 열 한 사도의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에 부여된 권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에게 부여된 이 권세는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부여되었습니다.
즉 교회는 생명의 귀중함을 다루는 영혼의 병원이요 구원의 방주입니다.  우리가 이 권세를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지…


오늘은 (11/24) 주일입니다.

오늘은 거룩한 주일입니다.
각자 섬기는 교회에서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드리며
주시는 설교 말씀을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