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4/12) 말씀 묵상 (누가복음 22장3절, Luke 22:3)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니라.
Then Satan entered Judas, called Iscariot, one of the Twelve.
And Judas went to the chief priests and the officers of the temple guard
and discussed with them how he night betray Jesus.
본문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줄 방도를 의논하고, 돈을 주기로 약속하며, 이를 유다가 허락하는 내용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이 철저히 준비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이 분위기의 총 연출자는 누구인가? 가룟 유다인가?
아닙니다. 가룟 유다에게 들어간 사탄입니다. 사탄은 유다와 대제사장들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에 종지부를 찍고 모든
것을 실패로 만들려고 작정하고 계획을 진행시켰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역 초기부터 예수님을 시험했고 그 시험이
실패했지만 예수님을 완전히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기회를 노렸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베드로에게 들어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 못하도록 책망하는 말도 서슴없이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가룟 유다를 통해 그리고 늘 예수님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잡아서 죽이려고 했던 종교 지도자들을 통해 이제 그 모든 것을 끝내려고 했습니다.
사탄은 십자가를 통헤 죄의 권세가 멸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을 대적하고 십자가의 도가 전해지지 못하도록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했던, 예수님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던 사탄이 오늘날을 사는 믿음의
사람들을 신앙생활을 잘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겠습니까? 절대로 사탄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만약 믿음의
사람들이 죄에 빠져 살고 있다는 그냥 내버려두지만 만약 지금도 열심을 내어 섬기고 전도하는 성도는 자신에게 최대의
위협이 되기에 절대로 그냥 두지 않습니다. 그런 성도들에게는 가장 큰 유혹이 되는 재물이나 명예나 육체적인 종욕을
채워주는 것으로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사탄은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도 무너뜨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수없이 많은 교회들이 갈라지고 문을 닫고 세상에 덕을 끼치지 못하는 행동도 하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교회가 세상을
염려하기도 하지만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조롱하고 비웃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한 영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사람들은 때로 그런 유혹에 넘어가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다시 일어나서
교회를 굳게 붙들고 계시는 예수님과 십자가를 굳게 붙들고 사탄의 궤계와 싸워야 합니다. 오늘도 고난주간을 묵상하며
주님과 십자가를 굳게 붙들고 믿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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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11) 말씀 묵상 (마태복음 26장2절, Matthew 26: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As you know, the Passover is two days away–
and the Son of Man will be handed over to be crucified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이미 아셨고 제자들에게 이 시간이 되기 전에 몇 차례나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3년 동안 동거동락하며 삶을 나누었던 자신의 제자의 손에 의해 팔려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요? 그렇게 자신의 고통과 아픔과
제자들에게 토로 하셨을 때에 과연 제자들은 예수님의 심정을 제대로 알 수 있었을까요? 그들의 관심은 예수님을 통해 자신들이
무엇을 얻을까에 큰 관심이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죽으신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죽으시면 자신들의 큰 기대가 무너지는 것이기에 오히려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주님을 향해 꾸짖으며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까지 했습니다. (마태복음 16:22)
그렇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예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 죄의 대가를 대신 치르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을
말씀하셔도 과연 우리가 그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일까요? 또 우리를 위해 죄가 없으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도록 내버려
두신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고난주간을 지내며 아들을 죽게하실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깊이 깨닫고 그 모든 것이 바로 죄 때문임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예수님을 믿기 전과 같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양심에 찔림도 없었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 백성으로, 예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삶을 회복하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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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10) 말씀 묵상 (누가복음 19장45절, Luke 19: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Then he entered the temple area and began driving out those who were selling.
It is written he said to them, ‘My house will be a house of prayer’;
but you have made it a den of robbers.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거기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파는 것은 제사를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었고 예배를 돕기 위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런 것들은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화를 내신 것은 그것들을 팔아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취할 이익에 눈이 멀었고 제사장들은 뇌물에 눈이 멀어 예배드리는 것 보다 그런 상행위가 더 중요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월요일에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멀리서 절기를 지키러 오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큰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는 절기를 지킴에 반드시 있어야 할 제물을 비싸게 판 것입니다. 비싸게 판 것도 좋지가 않지만 그 중에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가축들 가운데 병 들고 흠이 있는 것들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것 조차도 터무니 없이 비싸게 팔았고
멀리서 온 사람들은 제물이 없이는 절기를 지킨 것이 아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인데 그들은 팔레스타인 밖에서 사는 사람들이었고 당연히 헬라 문화에서
사는 사람들이었기에 헬라 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에 들어가려면 누구도 예외가 없이 히브리 돈 즉 세겔을
내야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데나리온을 세겔로 바꾸어야 하는데 성전에서 비싸게 환전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것도 예배드리러 오는 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옳지
못하기에 그들을 내어쫓으시고 성전의 원래 목적을 회복하려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좋은 의도로 물건을 팔기도 하고 선교바자회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것은 그것 때문에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예배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 때문에 시험에 들고 관계에 문제가 되고
교회 전체에 덕이 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잘못되게 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연약한지라 작은 것에도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혹시라도 좋은 의도가 잘못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사고 팔고 하는 행위는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전에 모일 때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가시는 마지막 한 주간에 이것부터 먼저 깨우쳐 주셨습니다.
평소 예수님의 삶과 인격을 돌아볼 때 다소 과격하다고 느낄 수 있는 행동이셨지만 그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모이기에 힘쓰고 모일 때 마다 예배와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여
세상 속에서 흔들림 없이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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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9) 말씀 묵상 (요한복음 12장12절, John 12: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The next day the great crowd that had come for the Feast heard that Jesus was on his way
to the Jerusalem city. They took palm branches and went out to meet him, shouting,
‘Hosanna’ ‘Blessed is h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
‘Blessed is the King of Israel’
우리는 오늘을 종려주일로 지킵니다. 종려주일이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키는 주일입니다.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온 무리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데 살마들은 예수님의 행하신 많은 기적을 보고 그 분을
정치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시고, 모든 질병 가운데 구원하러 오시는 메시아로, 왕으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이신 것은 맞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정치적인 왕과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은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죽음의 길은 영광의 길을 가기 위한 과정입니다.
우리도 신앙의 최종 목표인 영광과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면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길입니다.
종려주일을 시작으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까지의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공적인 사역 가운데
마지막 한 주간입니다. 이 고난주간 동안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가셨던 고난의 길을 깊이 묵상하며 그 분이 왜 그런
힘든 길을 가셨어야만 되었는지, 그 분의 죽으심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 사실이 지금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묵상하며 우리도 십자가를 통한 영광과 승리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모두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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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8) 말씀 묵상 (출애굽기 20장24절, Exodus 20: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Make an alter of earth for me and sacrifice on it your burnt offerings and fellowship offerings,
your sheep and goats and your cattle.
Wherever I cause my name to be honored, I will come to you and bless you.
하나님께서는 토단 즉 흙으로 제단을 쌓거나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만들어서 자신에게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연장을 사용하거나 아름답게 꾸미므로서 사람의 손이 무엇을 이루어냈다는 교만의 죄를 품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화려한 성전이나 외식하거나 꾸며진 어떤 모습 보다는
진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높혀지고 경외받으며 기억되는 곳에 임하시며
또 그렇게 예배하는 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나의 공로가 조금도 보태지지 않는 온전한 겸손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이름만
높여지는 진심의 예배를 드립니까? 그런 준비를 합니까? 예수님께서도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진리 안에서, 그리고 성령 안에서 드리라는 말씀인데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진정한 마음으로, 온전한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것을 올려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던 예배와 같습니다.
그런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그런 예배자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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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7) 말씀 묵상 (요한복음 13장1절, John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It was just before the Passover Feast.
Jesus knew that the time had come for him to leave this world
and go to the Father, Having loved his own who were in the world,
he now showed them the full extent of his love.
예수님께서는 비록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하나님 아버지와의 매일의 관계 속에서 이 땅에서의 매일 매일의
여정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미래까지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을 앞두고 자신이 다시 원래 계셨던 곳,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신 곳으로 가셔야 함을 아시고 이 땅에 제자들을 남겨 두고 가실 것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끝까지 사랑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해석이 아니더라도 그냥 본문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사랑을 절절히 느껴지는 말씀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나 세상적으로 볼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렇게까지 예수님께서 사랑할 만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 것이고, 늘 큰 소리를 뻥뻥치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며, 나머지 제자들도 결국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할 자들입니다. 그런 제자들의 미래를 이미 다 알고 계셨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사람을 바꾸는 힘입니다. 진짜로 사람을 바꾸는 힘은 어떤 허물과 배신과
배은망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그 변함없는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겸손한 사랑이며, 우리의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이요, 끝까지 기대하며 인내하며 기다려주는 사랑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그런 사랑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 힘으로는 못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오늘도 종려주일을 앞두고 우리를 그렇게 끝까지 사랑하신 그 주님의 사랑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깨달아지고
다시 믿음 위에 굳게 서고 심령이 변화될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랑을 조금이라도 나누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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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6) 말씀 묵상 (이사야 42장10절, Isaiah 42:10)
항해하는 자들과 바다 가운데의 만물과 섬들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
Sing to the Lord a new song, his praise from the ends of the earth,
you who go down to the sea, and all that is in it, you islands, and all who live in them.
본문에서는 바다 가운데 항해하는 자들 즉 세상에 거하는 모든 자들은 마땅히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께 힘을 다해 찬송하고
새 노래로 노래하며 영광을 돌릴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던 한 무리가 아니라 전 세계 민족이 온 세상을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새 노래’는 새 은혜가 심령에서 솟구쳐 나오는 찬양을 말합니다. 마땅히 죄로 인해 죽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해 주신 그 은혜가 너무 커서 감격하여 부르는 노래가 바로 새 노래입니다. 즉 메시야를 통한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올려드리는 찬양을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새로운 노래라기 보다는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노래라고
보는 것이 더 맞는 해석이라고 봅니다. 같은 찬송을 수도 없이 불렀지만 아무런 은혜와 감동이 없다가 어느 날, 어떤 계기로 인해
같은 찬양을 부르는데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지며 뜨거워지는 그런 때가 바로 ‘새 노래’로 찬양을 드리는 순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는 성도는 아무리 같은 노래를 불러도 날마다 은혜를 깨달으며
새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날마다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은혜 안에 사는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엡 4:23) 날마다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야 합니다. 매일이 새로운데
매일 올려드리는 찬양 또한 새롭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는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까?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올려드립니까? 흥얼거림이 있습니까? 종려주일과 고난주간 부활주일을 앞두고 날마다 심령이 새롭게 되어 새 노래를
올려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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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5) 말씀 묵상 (에베소서 6장10-11절, Ephesians 6:10-11)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Finally, be strong in the Lord and in His mighty power.
Put on the full armor of God so that you can take your stand against the devil’s schemes.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을 사는 동안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영적전투를 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세상은 잠시 마귀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마귀의 궤계 즉 간사한 유혹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엄습해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마귀가 싸움을 걸어옵니다. 특별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특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더더욱 가만히 두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귀에게 있어서는 아주 위험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영적전쟁이라고 말합니다.
전쟁에서 필요한 것은 많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힘과 강건함 즉 용기입니다. 우리가 이 전쟁에서
강건해질 수 있는 방법은 주님 안에서와 그의 능력으로 입니다. 주 안에 있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이고
그 힘과 능력은 성령충만을 의미합니다. 다시말해서 말씀과 성령충만 만이 마귀의 궤계를 대적하여 이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우리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영적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옛뱀이요 사탄인 마귀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악을 완전히 멸하실 때까지 공중 권제를 쥐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날이 오기 전까지 사람들이 구원을
얻지 못하도록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것을 방해합니다. 죄에 빠지게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마귀의 간악하고 달콤한 궤계를 방어하고 또 공격할 수 있는 모든
무기를 갖추고 싸워야 합니다. 장비만 좋다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전략이 필요하고 정신무장이 필요한데
바로 이것을 성령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 살고는 있지만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존재요
이미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에 우리도 궁극적으로 승리한다는 자신감과 능력을 부여해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충만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하는 겁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진리, 의, 복음, 믿음, 구원, 말씀) 무시로 기도함으로 성령충만을 받아 마귀와 싸워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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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4) 말씀 묵상 (시편 84편5-6절, Psalms 84:5-6)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물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주나이다.
Blessed are those whose strength is in you who have set their hearts on pilgrimage.
As they pass through the Valley of Baca, they make it a place of springs;
the autumn rains also cover it with pools.
시편 기자는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이 시온으로 가는 것을 사모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힘들고 지치고 육신에 병도 생길 때 무력감에 빠지고 심지어 살아갈 용기마저도 다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슬픔 많은 이 세상을 가리켜 ‘눈물 골짜기’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말을 해석함에 있어 다양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곳이 거칠고 물이 크게 부족한 곳임을 나타내줌과 아울러 고통스러운 곳을 상징합니다. 그러할 때라도
시온을 향해, 성전을 향해,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힘차게 나가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를 향하여 간절한 마음을 가지는 자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힘든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 때 하나님은 자신에게 끝까지 나오는 자들에게 샘과 아른 비를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얻는 기쁨과 위로와 평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4:14)
이 땅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사실을 아셨기에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고 (마 6:34)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는 그 길은 갈수록 더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역차별을 당하고 손해를 보고 테러도 당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눈물의 골짜기를 지난다해도 우리는 일어서서 끝까지 하나님께서 계시는 시온을 향해 담대히 나아감으로
그 분이 주시는 샘과 이른비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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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3) 말씀 묵상 (잠언 3장6절, Proverbs 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In all Thy ways acknowledge him, and he shall direct thy path.
여기서 인정한다는 말의 어근은 알다는 의미의 ‘야다’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그리고 이 ‘야다’의 의미는 그저 지식적으로나
소문을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순종과 통찰과 경험 속에서 발견하는 실제적이고 체험적인 산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고 모든 지혜와 능력의 원천이 되신다는 사실을 실제적으로
경험했다는 말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지혜와 지식과 능력과 경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똑똑함을 부인하고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당연히 어떤 일을 하더라도 먼저 하나님의 인도를 구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지도하십니다.
여기서 길을 지도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길을 안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장애물을 제거해 주시고
삶의 여정을 평탄케 하거나 혹은 보다 낫게 하시며 정해진 목표에까지 데려다 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고 알고
체험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을 믿고 평안하고 염려가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적지 않은 경우,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자신이 생각하기에 사소하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배제하고 스스로
결정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 분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시는 분이신데 우리의 사소함을 모르시겠습니까? 그것은 결코
지혜로운 삶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그 분의 섭리 안에 있음을 믿고, 모든 것이 그 분의 필연적인 계획 안에 있음을 믿고
모든 일에 그 분께 먼저 아뢰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오늘도 하루를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시면서 하나님을 인정함으로
종일토록 그 분의 지도함을 받는 복된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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