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3/15) 말씀 묵상 (레위기 19장32절, Leviticus 19:32)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아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Rise in the presence of the aged, show respect for the elderly
and revere your God.  I am the Lord.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은 공경의 대상이었습니다.  노인은 인생의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회중이 모인 자리에 노인이 들어서면 그를 공경하는 의미로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예를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구전으로 전수되던 시대에는 노인을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한 증표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노인을 공경하지 않는 사회를 정죄했습니다. (사 3:5절)  이렇게 노인을 공경하라는 의미를 통하여
모든 윗사람을 존경하라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노인 문제는 (aging)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각 가정에서 신앙적인 타락과 핵가족화로 인한 이기적인 삶의 추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질실한 신앙은 기본적인 예의 범절을 지키는 것으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그저 신앙적인 열심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예의 범절, 법을 잘 지키는 것에서도 드러나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자녀됨을, 그럴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임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됩니다.
 
노인을 공경함에는 가장 먼저 나이드신 부모님을 잘 모시는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나이든 부모를 버리는 고려장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오늘날에도 치매나 거동이 불편한 부모를 버리거나 잘 모시지 않는 자녀들이 적지 않습니다.  돈이 없는 부모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경제적인 능력이 있는 부모에게는 그 돈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억지로 부모를 찾아가고 공경하는 척 합니다.  이제는 부모 공경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이익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 2천여 년 전에 사도 바울은 경고를 했습니다.  말세가 되면 부모를 공경치 않는 것이 그 현상 중의 하나라고 선언했는데 우리 세대에서 그 예언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실 때 하나님을 향한 계명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에 관계된 계명도 주셨습니다.  그것이 5번째부터 마지막 10번째 계명입니다.  인간 관계에 관한 계명 중 첫 번째 계명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사람에게는 장수와 형통의 복을 주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고령화 문제는 갈수록 사회적인 문제가 되겠지만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그런 분들을 공경할 때 풀어질 수 있습니다.  이제는 자녀를 낳지 않거나 한 명 정도밖에 낳지 않는 가정이 많기에 사회에 일을 할 사람이 
극히 부족합니다.  갈수록 더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런 빈자리를 나이드신 분들이 메우고 있습니다.  그 분들은 경륜도 있기에 필요합니다.  그러다보니 젊은이들과 함께 하는 분들이 적지 않은데 거기서 세대간의 갈등이 생기고 분열도 생기고 있습니다.
구약시대는 물론이고 신약시대에도 부모를 포함한 나이가 드신 분들을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척도입니다.
오늘도 부모님들은 물론 만나는 나이드신 분들을 진심으로 공경하고 잘 모심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뿐만 아니라
약속하신 복도 누리는 믿음의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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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14) 말씀 묵상 (요한1서 4장16절, 1 John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And so we know ans rely on the love God has for us.  God is love.
Whoever lives in love lives in God, and God in him.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해서 믿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지식이 믿음보다 선행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느나 요한복음에서는 믿음이 지식보다 선행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요 6:69절)  그러나 지식과 믿음은 어느 것이 먼저 되고 어느 것이 나중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써 알게 되고, 또 알게 됨으로 믿게 되는 것이기에 이 앎과 믿음은 상호 보완적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만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안 되에 행한다는 뜻으로, 믿음의 행위와 같은 의미를 수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그 분의 사랑도 함께 거하기에,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사랑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할 줄을 모릅니다.  받아본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받은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사랑할 때 드러나고, 그 사랑은 점점 깊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안에 이루어질 온전한 사랑을 바라보며 사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신앙은 지식과 믿음의 결합체로서 사랑의 행위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죄가 없으신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님을 우리 같은 죄인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하시기 위해 이 땅에 보내사 십자가에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분이 가지고 보여주셨던 사랑입니다.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보여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 크신 사랑을 직접 목격했던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선포했습니다.
누구라도 예수님을 자신의 죄를 사해주신 구세주로 믿으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죄인에서 용서받은 죄인이 되었고 진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우리 안에 있기에 그 사랑을 실천함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오늘도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눔으로 하나님의 자녀됨을 증거하는 빛된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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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13) 말씀 묵상 (이사야 25장11절, Isaiah 25:11)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O Lord, you are my God; I will exalt you and praise your name, 
for in perfect faithfulness you have done marvelous things, things planned long ago.
 
선지자는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또한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일로 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정하신 뜻대로 모든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는 새롭고 놀라운 것으로 보이는, 이 기사들은 하나님께서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해오셨습니다.
그러니 그 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그 분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이적과 놀라운 일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정하신 뜻을 우리 인생이란 수레바퀴에서 성실하고 진실되게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현재 처한 상황과 처지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높이고 찬송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 마지막인 150편에서 ‘호흡이 있는 모든 자마다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라고 선포한 이유입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든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상황이 나쁠 때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들고 찬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라도 우리의 의지를 꺾고 그 분의 섭리를 믿으며 그 분을 찬양할 때 우리 삶이 놀랍게 달라집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신령한 복을 받는 준비된 그릇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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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12) 말씀 묵상 (히브리서 13장7절, Hebrews 13: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알려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Remember your leaders, who spoke the word of God to you.
Consider the outcome of their way of life and imitate their faith.
 
말씀을 인도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존중에서 우러나옵니다.
우리는 늘 부족하고 연약해서 누군가의 지도를 받고 순종해야 할 자들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한 겸손에서 지도자에 대한 겸손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지도자들을 세워 성도들을 가르치며 목양하며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기억하면서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권면합니다.
제자의 삶은 모델을 보고 따라함으로 습득하는 생각과 실천과 습관입니다.
 
우리가 성공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선배,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성도들을 지도하던
교회의 지도자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들이 전해주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들이 보여준 믿음과 선한 행실을 
되돌아보고 따라갈 때 우리의 신앙도 자라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말씀 인도자들이 즐겁게 그 일을 하도록 
협력해야 합니다.  결국 그들의 수고로 인한 유익은 성도들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역자들은 성도들이 순종하고 자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리더들도 인간적인 연약함을 가지고 있기에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본받고 따라가야 할 리더가 없다고도 합니다.
그렇다고 혼자 지낸다면 신앙이 자랍니까?  비판만 하고 불평만 하다고 해서 뭐가 달라집니까?  오히려 더 위험과 유혹과 자기 집착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마음에 쓴뿌리가 커져가고 그로 인해 신앙이 크게 위기에 처할 수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리더로 믿고 기도하며 서로 권면하고 고쳐나갈 때 믿음의 공동체가 바로 설 뿐만 아니라 믿음도 성숙하게 되고 자신도 본이 되는 리더로 변화하게 됩니다.  자신이, 세워진 리더를 잘 따라 가고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하고 있는지 돌아보고 바른 말씀을 좇아갈 뿐만 아니라 리더의 연약함을 위해 기도하며 채워가는 성숙한 믿음의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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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11) 말씀 묵상 (전도서 3장11절, Ecclesiastes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He has made everything beautiful in its time.  He has also set eternity in the hearts of men;
yet they cannot fathom what God has done from beginning to end.
 
우리는 현재 있는 모든 것을 될 수 있는대로 잘 이용해야 하며, 그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믿고, 그것에 순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즉 인간의 마음에 무한한 시간의 개념과
불멸을 소망하는 열심을 심어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원을 볼 수 있는 시각과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지만,
인간에게 존재의 모든 신비를 계시해 주신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인간의 한계는 분명히 있습니다.
지상에 존재했던 그 어느 누구도 인생의 절대적인 진리와 우주의 모든 섭리를 완전히 깨달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깊이 깨닫고 겸손해야 합니다.  이에서 지나쳐 자신이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며 죄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측량할 수 없음을 분명히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또힌 우리 마음 속에 세상 것들을 너무 많이 두고 있으면서, 그것들에게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너무 많이 빼앗기므로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정작, 그 일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보지 못할 정도로 시간과 정신을 빼앗긴 채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혹시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하나님보다 앞서가는 것은 없는지,
자신이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없는지 겸손히 자신을 창조주 앞에서 돌아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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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10) 말씀 묵상 (베드로전서 4장10절, 1 Peter 4:10)

각양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Each one should use whatever gift he has received to serve others,
faithfully administering God’s grace in its various forms.
 
모든 교회의 모든 성도는 교회 생활에 사용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영적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서로를 위한 사랑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주의를 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영적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럴 때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기쁨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은사 (charisma)는 ‘은혜의 선물’을 의미합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선물로 받을 때, 
모두는 이 은사를 다른 신자들과 나눌 책임을 가집니다.  그런 나눔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자녀들 각 개개인에게 은혜의 선물을 주신 것은 전체 몸인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들은 우리의 삶에 그 분의 은혜의 유익을 전해주는
하나님의 대리인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사를 개인적으로 사용하도록 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받은 은사가 무엇인지를 우선 알고
또한 그 은사를 바르게 사용함으로 섬기는 교회에 유익한 청지기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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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9) 말씀 묵상 (시편 19편14절, Psalms 19: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 되기를 원하나이다.
May the words of my mouth and the meditation of my heart
be pleasing in your sight, O Lord, my Rock and my Redeemer.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사역을 깨우쳤고
말씀을 통해 삶의 원리를 깨우쳤다면, 그 깨달음을 통해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마음과 생각과 말이 제물처럼 하나님께 그쁘게 드려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에서부터 벗어나
그 분을 기쁘시게 할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죄에서 떠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애쓰지만 여전히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죄와 허물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갈등하고 고민합니다.  죄책감도 있습니다.  그런 연약함을 잘 알았던 다윗은
자신의 무수한 허물과 죄를 깨끗이 씻어주실 분은 오직 여호와 한 분 뿐임을 믿고 그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해결하실 것을 믿고 확신하며 지금까지 기도해 왔습니다.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은 
기도의 다른 표현이라고 봅니다.
 
우리의 영이 깨어 민감하게 우리 자신을 살피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마음이 무디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과 생각, 행동이 모두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실 향기로운 제물로드려질 수 있도록
오늘 하루도 우리 모두 깨어서 묵상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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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8) 말씀 묵상 (베드로전서 4장19절, 1 Peter 4: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So then, those who suffer according to God’s will should commit themselves
to their faithful Creator and continue to do good.
 
사도 베드로는 로마와 유대교로부터 오는 핍박을 피해 나그네와 같이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리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고난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줍니다.
사람들이 고난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것이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고 오히려 손해가 되고
삶에 고통을 줄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난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나면 고난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즉 믿음 때문에 고난당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 받는 자들’입니다.  한 사람이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고난에도 분명한 이유가 있고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기에 또한 끝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할 때 고난 속에서도 기대함이 있기에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으며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믿음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게 하는 연단과 정련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이 있기에 우리를 분명히 보호해 주실 것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고 더 바라고 의지하며 나가야 합니다.  고난이 없는 인생이 있겠습니까?  단지 사람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를 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감당할 시험과 고난을 주십니다.  따라서 어떤 고난이 오더라도 넘어지지 말고 신앙의 성숙과 연단의 계기로 알고
넉넉히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알고는 있지만 막상 고난을 당하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기뻐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늘 어린애와 같이 지내지 않고 강한 군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군인에게 훈련이 필요한 것처럼 믿음의 자녀들에게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과하고 나면 그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따라옵니다.  이것은 약속입니다.  고난 뒤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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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7) 말씀 묵상 (에스겔 47장12절, Ezekiel 47: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Fruit trees of all kinds will grow on both banks of the river.  
Their leaves will not wither, nor will their fruit fail.
Every month they will bear, because the water from the sanctuary flows to them.
Their fruit will serve for food and their leaves for healing.
 
.에스겔 선지자가 본 환상입니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실과가 자라고 그 잎사귀는 시들지 않을 것이며, 그 나무의 과실들은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과실나무는 성소에서 흘러나온 물에서 자양분을 얻기 때문에 매달마다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나무들은 영원히 푸름을 자랑하며 끊임없이 양식을 공급받는 에덴동산의 나무들과 같을 것입니다.
이 나무들의 실과는 음식으로 사용될 만큼 먹을 만하며 그 잎은 약 재료가 될 것입니다.
병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성경 전반에 언급되어 있고,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경험해 왔습니다.
 
이렇게 성소로부터 공급되어 모든 생물을 소생케 하며 열매를 맺게하는 물은 곧 멸망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이스라엘을 소생시키는 하나님의 축복과 구원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보좌에서 자기 백성에게 흘려보내시는 구원은 작은 데서 시작하여 점점 충만하게 풍성하게 됩니다.  이같은 축복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믿음의 자녀들에게도 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이 생기가 없는 삶을 사는 것은 단지 각 개개인의 그릇이 축복을 담기에 너무 작기 때문입니다.  깨끗하지 않은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풍성한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적인 의미의 복도 있지만 가장 먼저는 신령한 은혜입니다.
위로부터 임하는 평화와 능력과 지혜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께서 주시고 싶으셔도 그것을 담는 그릇이 깨끗하지 못하면 주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복들을 잘못 사용하여 잘못될까봐서 입니다.  오늘도 풍성하게 흘러내리는 생명수를 먹고 마시기 위해 먼저 우리 자신을 깨끗한 그릇으로 만들고 그리하여 축복의 통로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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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6) 말씀 묵상 (고린도후서 11장15절, 2 Corinthians 11:15)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It is not surprising, then, if his servants masquerades as servants of righteousness.
Their end will be what their actions deserve.
 
교회 안과 밖을 혼란케하고 분열케 하는 거짓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거나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머리라고 할 수 있는 사탄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이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흑암의 권세를 지니고 흑암의 세계를 통괄하고 있는 사탄이 사람들에게 접근할 때 하아상 빛으로 그 외모를 단정하고 접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아무리 그렇게 외적으로 좋게 가장을 한다고 해도, 또한 그 일로 인해 잠시 성공한다고 해도 종말에 가서는 그들의 본색을 드러낼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질이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입니다.  본질이 살인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형벌을 반드시 받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자신을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여 양 떼들을 흩어놓고, 그릇된 길로 인도하고 그들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까지 있어왔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있을 것입니다.  그들 또한 마지막 날에 준엄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말로는 그럴 듯하게 하지만 결국은 그들의 아비인 마귀처럼 자신들의 배를 위함이고 믿음의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자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영분별력을 가지고 그들의 위선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를 바르게 섬기고 지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남들에게 오해를 받거나, 비난을 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바르게 섬기는 것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럴 때 언젠가는 진리가 밝혀질 것이고 진정한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은 반드시 옵니다.  그 승리의 날을 사모하며 오늘도 영적으로 깨어서 선한 싸움을 싸우며 어둠을 밝히는 의의 일꾼으로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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