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1/4) 말씀 묵상 (시편 103편13절, Psalms 103: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As a father has compassion on his children;
so the LORD has compassion on those who fear him.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유한하고 한계가 있음을 아실 뿐만 아니라, 또한 체질이 진토처럼 허약한
존재임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fear) 자들을
향하여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할 때, 오히려 힘주시고, 도우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또한 그 분을 찬양할 때 우리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
질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우리 입술로 시인하고 선포할 때 얼마나 강력한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자신이 세운 목표를 날마다 보고 외치고 결심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런
영적인 경험이 새해를 맞은 우리 모두에게 넘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의 (1/3) 말씀 묵상 (역대상 16장25절, 1 Chronicles 16:25)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요.
For great is the Lord and most worthy of praises;
he is to be feared above all gods.
 
비록 자식은 연약할지라도 능력 있는 부모가 있다면 그는 자신만만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잘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이스라엘을 강성하게 만드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존귀와 위엄, 능력과 즐거움의 원천이십니다.
그분의 영광과 기이한 행적은 모든 민족과 만민 중에서 마땅히 찬양받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위대하신 분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세상의 모든 신들은 헛것이요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참 신이시며 영원하신 분이시며 실재하시는 창조주이십니다.
 
다윗이 만났던 이 위대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확신한다면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확신하며 그 분이 주시는 담대함과 평강을 누리는 삶을 사십시다.


오늘의 (1/2) 말씀 묵상 (고린도전서 4장2절, 1 Corinthians 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Now it is required that those who have been given a trust must prove faithful.
 
고린도교회 분열의 원인 중 하나는 성도들이 가졌던 지도자들에 대한 오해였습니다.  아무리 지도력이 탁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그리스도의 종일뿐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세상적인 지혜를 가지고 군림하며 명예를
얻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러한 왜곡된 지도력은 교회에 분열을 가져옵니다.  진정한 지도력은 청지기로서
충성하는 것입니다.  높임을 받기보다는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지혜로운 청지기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지도자란 하나님의 충성된 청지기임을 이해하고 그들이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서 맡은 역할을
묵묵히 감당하도록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반드시 사역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직분을 맡은 사람이라면 리더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리더는 재능이나 학벌이 아니라 충성된 사람입니다.  신실하며 신뢰할 만한 사람입니다.
우리 각자는 주님의 몸된 교회로부터 맡은 직분에 맞게, 또한 하나님의 주신 사명에 충성하고 있습니까?  혹시 직분을
명예로 생각하거나 권위로 여기고 섬기는 자가 아니라 군림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교회의 리더를 돕고 있습니까?
오늘날과 같이 잘못된 리더십으로 인해 교회가 더욱 세상으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받는 이 때, 교회를 회복하는데
앞장서는 충성된 일꾼이 되십시다.


오늘의 (1/1) 말씀 묵상 (잠언 8장17절, Proverbs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I love those who loves me,
and those who seek me find me.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올 한 해를 이치에 맞게 살아가기 위해 참 지혜를 묵상해 봅니다.  지혜는
모든 사람에게 그 유익을 전해줄 수 있지만, 실제로 그 유익을 받는 사람은 지혜를 사랑하고 구하는 자들 뿐입니다.
이 지혜는 단순히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올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을 의미합니다.  지식을 써먹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것이며,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가 그 분을 만날 것입니다.  그 지혜는
자기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찾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지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올 한 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을 간절히 찾음으로, 위로부터 임하는 은혜를 얻고
지혜를 누리는 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의 (12/31) 말씀 묵상 (룻기 2장12절, Ruth 2: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May the Lord repay you for what you have done.
May you be richly rewarded by the Lord, the God of Israel
under whose wings you have come to take refuge.
 
이방 여인으로 이스라엘 사람과 결혼하여 남편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를 따라 이스라엘 땅으로 왔던
룻이 시어머니의 지혜로 친척인 보아스가 소유한 땅에서 이삭을 줍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안 보아서는 특별히
룻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친척의 며느리이기도 하지만 이방인으로서 자기 나라를 떠나서까지 
시어머니를 공경하고 그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룻으로 하여금 자기
땅에서 이삭을 줍게 허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보호까지 하도록 했습니다.그런 다음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녀의 모든 행동에 대해 보응해 주실 것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보응이라는 말은 신약에서 상급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성도의 상급이 경건한 생활에 대한 대가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인가는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르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십니다.  그렇지만 그 상급은 반드시 물질적인 보상은 아닙니다.  도리어 성도의 선행과 구제,
기도, 금식 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욱 밀접하게 교제하는 것이 바로 가장 확실한 보상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기복신앙은 분명히 잘못되었습니다.  모두에게 임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룻이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지극히 사랑하고 섬겼을 때 그것은 율법을 잘 지킨 것이므로 보아스가 하나님의 보상을
믿고 축복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충성하면 좋으신 하나님께서 그 분의 주권대로 신령한
은혜와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 뿐만 아니라 풍성한 은혜도
누리는 복된 삶을 사십시다.


오늘의 (12/30) 말씀 묵상 (사도행전 10장15절, Acts 10:15)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The voice spoke to him a second time,
‘Do not call anything impure that God has made clean.’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딤전 2:4)  복음은 국경과 인종과 문화를 초월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속됨과 정결함은 인간의 경험이나 판단이나 전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모든 판단은 
하나님의 몫이므로 인간의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인간 최초의 범죄는 하나님의 판단을 자기
몫으로 여겨 선악을 판단한 것으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새해 부터는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사는 것
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판단으로 복음을 증거할 대상을 결정한다면, 하나님의 사역은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 역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결정권을 하나님께 드리고 온전히
순종하며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삶을 사십시다.


오늘의 (12/29) 말씀 묵상 (마태복음 12장20절, Matthew 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A bruised reed he will not break, and a smoldering wick he will not snuff out,
till he leads justice to victory.
 
예수님께서는 어디를 가시든 복음을 전파하셨고 (preaching), 가르치셨고 (teaching) 그리고 치유하셨습니다. (healing)
상한 갈대는 연약한 인간, 고통과 좌절로 인해 심편이 산산이 부서져 약해질대로 약해져 있는 영혼을 가리킵니다.
꺼져가는 심지는 마지막 한가닥 소망마저 다 없어져가는 절망적인 인생을 가리킵니다.  구약의 예언된 하나님의 종
예수님은 바로 그런 약하고 절망 가운데 있는 영혼들을 다시 살리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승리는 바로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분은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것처럼 힘으로 승리를
이루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종처럼 고난을 받으시고 온유와 겸손과 섬김으로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결코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공의를 세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죽으심으로 인해 죄의 권세를 멸하셨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사망의 권세도 멸하셨습니다.  그 모든
것이 바로 우리 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분 앞에 나오는 사람은 다시는 절망 가운데 살지 않게 됩니다.  비록 육신은 약해지지만 영혼은 날마다 새롭게
거듭납니다.  때로 세상에서 패배자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승리할 자입니다.  그러니 소망 가운데 힘차게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 분은 당신 앞으로 나오는 자를 결코 외면치 않으시고 돌봐 주십니다.  치유해 주십니다.
오늘도 세상을 이기신 주님 앞에 나아가 용서와 치유와 회복을 얻으십시다.


오늘의 (12/28) 말씀 묵상 (베드로후서 3장9절, 2 Peter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The Lord is not slow in keeping his promise, as some understand slowness.
He is patient with you,
not wanting anyone to perish, but everyone to come to repentance.
 
예수님의 재림은 초대교회의 가장 뜨거운 관심사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재림 시기에 관한 관심이 가장 컸습니다.
어떤 이들은 재림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고 더딘 것에 대해 불만을 가졌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에 대해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말합니다.  또한 주의 날이 늦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재림 자체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기다리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기다리시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회개함으로 구원받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사도는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은
예측할 수 없으며 도둑같이 모를 때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주의 날이 더디다고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더딤이 우리에게는 더 준비하는 기회라고 여기고 언제
주님께서 다시 오시더라도 기쁘게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반드시 도적같이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악을 완전히 멸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십니다.  그 날을 바라며 그 날을 준비하는 천국
백성으로 날마다 살아가십시다.


오늘의 (12/27) 말씀 묵상 (시편 51편11절, Psalms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Do not cast me from your presence or take your Holy Spirit from me.
 
이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세바와의 부적절한 관계 후, 나단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한 후에
쓴 시입니다.  죄사함에 대한 간구를 마친 다윗은 또한 죄 사함을 통해 새로운 마음과 영혼을 가지고 그에 걸 맞는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고 성령이 거두어진 사람의 모습을 사울에게서
보았기에, 사울과 같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미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경험한 다윗이었기에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가 용서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더 깊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쫓아내지 마실 것과 성령을 거두지 말 것을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겨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를 영적으로
성숙하게 하며 믿음으로 순종케 합니다.  다윗처럼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녀가 되십시다.


오늘의 (12/26) 말씀 묵상 (베드로전서 5장7절, 1 Peter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Cast all your anxiety on him
because he cares for you.
 
우리는 지금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염려는 내가 감당해야 하는 문제가 나보다 클 때 생깁니다.  우리는 거대한 세상 앞에서 아주 작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돌보심과 능력을 신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의 그 어떤
무엇보다도 크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지나친 염려’는 불신앙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염려를 주께 맡기라는 표현은 ‘염려는 너희가 할 일이
아니다’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염려하며서 끙끙대지 말고 염려는 하나님께로 보내고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 즉 뜨겁게 사랑하고, 은사를 따라 섬기고, 선한 양심으로 살면 됩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그 분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슬픔 가운데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으며, 염려 대신 기도를
택합니다.  그러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염려를 돌봐주십니다.  혹시 지금도 여전히 염려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신뢰하는지부터 먼저 돌아보시고 그 분께 기도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