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죄를 알지 못하신 이를 우리로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God made him who had no sin to be sin for us,
so that in him we might become the righteousness of God.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죄가 없으신 아들 예수님을 마치 죄인처럼 십자가에서 죄의 대가를 대신 지고 죽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크신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구원을 화해라는 아름다운 용어로 설명한 것은 고린도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자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개념이 아름다운 것만큼이나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을 권면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한다고 표현했습니다.
누구라도 예수님을 자신의 죄값을 대신 갚아주시고 구원을 허락하신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은 영생을 얻음과 동시에 한 가지 임무가 주어집니다. 그것은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도 화목하게 하는 일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었듯이 우리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로를 믿는 사람들이 바로 교회요 그런 무리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공동체도 교회입니다. 그 교회의 사명은 먼저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교제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복음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통해 이 땅에 평화를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도 바울의 권면은 다시 한 번 21세기에 존재하는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화목하게 하는 직분이 아니라 오히려 화목을 깨뜨리고 덕이 되지 않는지 모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 오히려 ‘싸우는 곳’으로 여깁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생겼던 문제는 오늘날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냈던 편지가 바로 우리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로 여기고 말씀으로 돌아가 순종할 때
그런 문제들이 사라지고 진정한 평화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는 복음의 통로가 되고 있습니까? 화목하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믿음에 걸림돌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의의 도구가 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죄의 도구가 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