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4/3) 말씀 묵상 (잠언 3장6절, Proverbs 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In all Thy ways acknowledge him, and he shall direct thy path.
 
여기서 인정한다는 말의 어근은 알다는 의미의 ‘야다’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그리고 이 ‘야다’의 의미는 그저 지식적으로나
소문을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순종과 통찰과 경험 속에서 발견하는 실제적이고 체험적인 산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고 모든 지혜와 능력의 원천이 되신다는 사실을 실제적으로
경험했다는 말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지혜와 지식과 능력과 경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똑똑함을 부인하고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당연히 어떤 일을 하더라도 먼저 하나님의 인도를 구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지도하십니다.  
 
여기서 길을 지도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길을 안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장애물을 제거해 주시고
삶의 여정을 평탄케 하거나 혹은 보다 낫게 하시며 정해진 목표에까지 데려다 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고 알고 
체험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을 믿고 평안하고 염려가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적지 않은 경우,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자신이 생각하기에 사소하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배제하고 스스로
결정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 분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시는 분이신데 우리의 사소함을 모르시겠습니까?  그것은 결코
지혜로운 삶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그 분의 섭리 안에 있음을 믿고, 모든 것이 그 분의 필연적인 계획 안에 있음을 믿고
모든 일에 그 분께 먼저 아뢰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오늘도 하루를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시면서 하나님을 인정함으로
종일토록 그 분의 지도함을 받는 복된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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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2) 말씀 묵상 (예레미야 5장1절, Jeremiah 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Go up and down the streets of Jerusalem, look around and consider, search through her squares.
If you can find but one person who deals honestly and seeks the truth,
I will forgive this city.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을 품고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분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 것을 좇음으로 그 분의 사랑을 헛되게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 분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만약 그들 중에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예루살렘을 멸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따른다고 하면서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떠났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거짓된, 위선된 삶을 보시고 통탄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면서 계속해서 세속적인 문화와 가치관에
빠져서 종교적인 행위만을 행할 뿐,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반역했습니다.  의인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은 택하시고 
여전히 사랑하시는 그들에게 벌을 내리고 싶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돌이키지 않는다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모든 죄가 다 사함을 받았습니다.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한 순간에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후로는 죄로 물들었던 옛 습성을 버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들이 바로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바르게 살지 못하면 세상은 점점 더 어두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죄와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점점 가까워지기에 세상은 점점 더 타락하고 혼탁해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전히 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살아서
역사하심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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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4/1) 말씀 묵상 (로마서 12장16절, Romans 12: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Live in harmony with one another.  Do not be proud,
but be willing to associate with people of low position.  Do not be conceited.
 
사도 바울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겸손한 마음은 
첫째, 서로 마음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합심의 의미보다는 타인에 대하여 우월감을 갖지 말고
동등한 관계로 다른 사람과 교제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나 다같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동등한 존재입니다.
둘째,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오히려 낮은 데 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신분이 낮은 사람과도 동등한 관계로
교제하는 마음 상태를 의미합니다.
셋째,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교만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겸손하고 정중하게 처신하는 것 같은 사람도 마음에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긴다면 그는 이미 겸손의 선을 넘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겸손에 대한 정의는 하나님만을
지혜로운 분으로 믿는 신앙을 강조합니다.
 
이런 겸손의 본이 되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피조물인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의 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나는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다고 하셨습니다.  (마 11:29)  그러신 다음 
자신에게 와서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같은 맥락으로 겸손할 것을 성도들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과 사도의 교훈에 따라 겸손한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할 때 사랑이 넘치고 공동체가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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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31) 말씀 묵상 (시편 18편6절, Psalms 18:6)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In my distress I called to the Lord; I cried to my God for help.
From His temple He heard my voice, my cry came before Him, into His ears.
 
시편 18편은 다윗이 쓴 시입니다.  이 시를 통해 다윗이 얼마나 큰 위험에 빠져있는지, 그의 대적들이 얼마나 큰 힘으로 
그를 엄습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성전에서 들으시고 그 기도를 열납하셨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부르짖었다’는 말은 그가 기도하면서
지녔던 마음의 열성과 진지함을 가리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들으셨다는 것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다윗의 모든 기도를 열납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다윗이 비록 절박한 상황에 처했지만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그 위기를 벗어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기도가 응답이 되었다는 겁니다.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사실도 기쁘지만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사실 또한 기쁨이 되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다른 사람에게 의뢰할 수 없기에 할 수 없이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오직 이 모든 상황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확신하고 그 분께
간절히 메달린 것입니다.  바로 그런 중심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그 기도를 응답하신 것입니다.
 
때로 믿음의 사람들도 이 세상에서 살다가 보면 사면초가의 상황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지경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눈앞의 상황에 압도되어 탄식하고 원망하고 절망하며 살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사방이 막혔다고 할 지라도 늘 한 곳, 즉 위는 열려있습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믿고 그 분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도움이 어디로부터 옵니까?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부터 
옵니다.  그 때가 바로 다시 하나님을 찾을 때입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부르짖으면 그 분은 항상 어디에 있든지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지금 삶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 모든 것이 형통하십니까?  감사함으로 기도하시면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며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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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30) 말씀 묵상 (야고보서 1장19-20절, James 1:19-20)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My dear brothers, take note of this;
Everyone should be quick to listen, slow to speak and slow to become angry,
for man’s anger does not bring about the righteous life and God desires.
 
야고보서는 ‘신약의 잠엄’이라고 불립니다.  그만큼 삶의 구체적인 교훈들이 들어있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듣고 말하는 것에 대해 구체적인 교훈을 줍니다.
우선 성도는 듣기는 속히 하라고 합니다.  즉 자기 주장을 내세우기에 앞서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먼저 그의 말을 들으라는 겁니다.  그 다음으로는 ‘말하기는 더디하라’는 겁니다.  대화의 내용을 정확하게 깨닫지 못하고
성급하게 말하는 과오를 범하지 말라는 겁니다.  즉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말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교훈합니다.  이런 모든 교훈은 성도가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을 닮아가도록 애쓰라는
말입니다.
 
듣기는 싫어하고 말하기 좋아하는 세대입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전문 분야는 들어주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의사와
상담가들입니다.  흔히들 이렇게도 말합니다.  ‘속에 있는 것을 꺼내놓으면 반은 치유된 것이다’  정말 그런 것 같지 않습니까?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 마음에 담아두기 때문에 병이 생깁니다.  들어주는 사람에게 친구가 많은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그리고 성도가 분노를 억제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선포합니다.
물론 사람이 분을 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분을 내는 것이 습관이 되거나 생활화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손상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만약 상대방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복음을 전하기 어렵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주는 교훈은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에서의 대인관계에 꼭 필요한 교훈의 말씀입니다.  과연 나의 듣고 말하는 태도는
어떻습니까?  잘 들어주고 말하기는 더디합니까?  그리고 상대방이 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 어떻게 반응합니까?  우선 화부터
내는 태도가 습관처럼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도 야고보의 교훈을 기억하고 말 하는 것은 줄이고 많이 들어줌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풀어주고 치유하는 성도의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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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29) 말씀 묵상 (잠언 16장17절, Proverbs 16:17)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이니
자기의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느니라.
The highway of the upright avoids evil;
he who guards his way guards his life.
 
정직한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할 대로는 바로 악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 길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에 반드시 승리와 평안이
보장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어려움이 없다거나 희생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길을 미워하는 자들로 인해
더 심한 반발과 대항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공의의 하나님께서 궁국적으로 승리케 하십니다.  그러니 그런 사실을 믿고 반대와
역경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영혼을 지키는 것은 정직한 사람들의 관심사이며, 자기의 행할 바를 고수하는 사람은 자기 행복을 고수하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이 ‘대로’가 바로 악을 떠나는 방편이 되는 이유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살아가는 지혜자의 생활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정직한 자로서,
악이 인도하는 위험한 곁길을 피하고
인생의 대로를 걸어가야 합니다.  
 
이 길은 좁고 꼬불꼬불하여 많은 사람들이 가기를 싫어하는 길입니다.  그렇지만 그 마지막은 승리요 영혼이 보장되며
생명이 있는 길입니다.  한 순간의 편함과 이익을 위하다가 보면 영원한 생명을 놓치게 됩니다.
넓고 평탄하고 쉽지만 파멸로 가는 길과 좁고 꼬불꼬불하여 힘든 길이지만 생명이 있는 길,
둘 중에 어떤 길을 선택하여 가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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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28) 말씀 묵상 (로마서 12장14-15절)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Bless those who persecute you; bless and do not curse.
Rejoice with those who rejoice; mourn with those who mourn.
 
자신을 핍박하는 자를 실제로 용서해 주고 더 나아가 복을 빌어주기까지 한다는 것은 인간의 타락하고 연약한 성품으로
볼 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자기에게 피해를, 손해를 입힌 자에게 우선 보복하려 하는 격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비록 자제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원수에게 재난이나 손실을 어떤 방법이든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런 마음이
일반적인데 오히려 그 원수가 잘 되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렇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이기도 하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성품이 변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또한 우리는 개인 위주의 사고 방식을 바라고 이타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살아야 함도 배웁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자신과 경쟁관계에 있거나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잘못되는 것을 속으로 기뻐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까지도 합니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다!’
 
하자민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이웃이 진정으로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기에
이웃과 함께 진심으로 동고동락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가족뿐만 아니라 낯선 사람, 즉 타국인이나 그 이상의 사람들과도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명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런 삶을 살 때 한 영혼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시대가 워낙 악하기에 가족이 잘 되는 것조차 배 아파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가족은 서로가 잘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모신 한 가족입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는 함께 울고 함께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마음 가짐이 어떤지 돌아보고 들어주고, 위로해주고, 덮어주고, 기도해주는 삶을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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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27) 말씀 묵상 (예레미야 6장15절, Jeremiah 6:15)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Are they ashamed of their loathsome conduct? No, they have no shame at all;
they do not even know how to blush.  So they will  fall among the fallen;
they will be brought down when I punish them, says the Lord.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남 유다를 멸하시겠다고  그들에게 전하게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이 택한 백성을 심판하시려고 하시는가?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도
죄에서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보고 계심을 알고서도 그 분의 목전에서 악을 행했습니다.
어떤 죄악들인가?  불신과 탐욕과 거짓과 자기 의로 인한 고집과 위선의 죄들입니다.  그들은 공의로우신 심판주 하나님을
무시하면서 날마다 죄를 범하기에 날마다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갔습니다.
 
그들은 죄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더 죄를 짓기에 담대해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죄에서 떠나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됨이 없이는 어떤 선한 행위로도 그 분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비록 택함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그들이 쌓은 죄로 인해 때가 되면 벌을 내리시고 그들을 파멸로 
이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계속해서 선지자를 통해 심판의 경고를 주십니다.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 외에 다른 구원의 방법은 없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한 그들은 진노의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심판의 때는 반드시 옵니다.  그 때가 되면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루게 될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준비하지 않는 자들 역시 갚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시작이 있듯이
세상 마지막도 반드시 있습니다.  기독교는 힌두교나 불교처럼 윤회 즉 돌고 돈다넌 윤회설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창조와 함께 시작된 역사가 이제 점점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음을 성경을 통해 알려줍니다.  그 마지막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입니다.  그 시와 때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점점
그 날이 가까워져 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날이 가까이 옴을 알고 날마다 죄에서 떠나 거룩한 삶을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이요 믿음의 사람입니다.  깨어서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준비하는 삶을 사십시다!
직선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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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26) 말씀 묵상 (고린도전서 8장6절, 1 Corinthians 8: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Yet for us there is but one God, the Father, from whom all things came and for whom we live;
and there is but one Lord, Jesus Christ, through whom all things came and through whom we live.
 
사도 바울이 살던 당시의 세상 사람들은 많은 신과 주를 임으로 만들고 그런 것들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보았으며 예수 그리스도도 다른 신이나 주와 비교가 될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창조의 실제적 역할을 담당했던 분으로 보았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주란 원래 이 세상의 각 지역을 담당하는 권세자들 즉 임금이나 상전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사용한 주라는 의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가리킵니다.  그 분만이 진정한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 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결국 이 두 분의 존재는 하나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한 분이심을 강조했습니다.  두 분 모두 창조의 사역을 하셨던 분들이고 두 분이 모든 신성을
공유하고 계신 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느나 그 본체가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을 창조하신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그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있다면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만들어낸 우상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우상이 살아있습니까?  능력이 있어서 필요할 때 도움을
줍니까?  무엇보다도 그런 우상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줍니까?  바른 믿음이 있어야, 바르게 믿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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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25) 말씀 묵상 (시편 37편23-24절, Psalms 37:23-24)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If the Lord delights in a man’s way,. he makes his steps firm;
though he stumble, he will not fail, for the Lord upholds him with His hand.
 
사람이 가는 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길인지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가는 길이 여호와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가 걸어가는 길은 견고하기에 그 사람이 결코 요동하거나 피곤하거나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그 길을 걸어가는 자는 결코 좌절하거나 장애에 걸려 넘어지거나 미끄러져서 다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길이요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굳게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길이라고 해서 항상 바르고 형통하고 평탄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의인도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는 것같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것같이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시고 늘 지켜보십니다.  그리고 완전히 넘어질 때면 손을 잡아주십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고 하신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셔서 그의 사랑스러운 자녀들을 눈동자같이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 우리의 손을 잡으시고 일으켜 주십니다.  이 사실에 우리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확신으로 험난한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바른 길을 걸어야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 분께서 영광의 면류관을 준비하시고 우리를 기쁘게 맞아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그 영광스러운 날을 그리면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의 길로 담대히 걸어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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